영원

I FOUND LOVE (격월 영원 18년 10월호)

배제 2018. 10. 31. 00:00






흰 백지를 마주하고 앉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원우 작가님, 이번에도 펑크 내시면 계약금 물어 주셔야 해요.]



메시지는 간결했다. 아니 간결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길면, 내가 행간 또는 요점을 읽지 못했다고 변명할 거리를 만들어줄 뿐이니. 계약금을 돌려 주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다. 나는 꽤 잘 나가는 작가고, 신작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인세를 매달 받는다. 하지만 계약 파기라니. 그것도 가장 메이저한 플랫폼에서 파기당한다면 재능있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이 바닥에서 나는 순식간에 잊혀질 테다. 사실 이 정도 플랫폼에서 내가 친 대형사고를 한 번이라도 눈감아 준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어지간한 사고도 아니었다. 데드라인은 15일 오전 8시였고, 지금은 18일 오후 두 시 삼십팔 분. 그리고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재능이라면 있을 거였다. 어릴 때부터 다독(多讀)해왔고, 중학생 때부터 청소년문학상을 탔다. 정식으로 등단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블로그에 소설을 썼고, 지금은 메이저 플랫폼이 펑크를 넘어가줄 만큼 이름있는 작가가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글을 쓰지 못한다. 간단한 문자조차도 작성하지 못해 연락은 무조건 전화였다. 병원에서는 실어증의 일종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떠한 사고도 겪은 적이 없다. 느리지만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지는 두렵다. 나는 종이를 눈앞에 펴 놓는 것만으로도 귀곡에 혼자 들어선 사람처럼 겁에 질리고 만다. 느리게 연필을 들었지만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연필을 내팽개쳤다. 깨끗한 종이 위로 거뭇하게 흑연 얼룩이 남았다. 연필은 책상 위를 도르륵 구르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심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줍지 않았다. 필기구가 없는 것을 핑계삼아 나는 책상을 떠났다. 의자를 집어넣기 전, 흰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는 것도 잊지 않고.







갑작스런 비극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어떤 계기도 떠올릴 수 없이, 글은 갑작스럽게 공포가 되어 찾아왔다. 종이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몇 년간 지켜온 작가로써의 자존심도 나에게 펜을 들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글을 쓰지 않는 나를 몰랐으므로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는 내가 아닌 채 이미 석 달을 보냈다. 그나마 의사의 조언대로 집 근처의 공원에 앉아 몇 분만이라도 햇빛을 쬐다 오는 게 내가 하룻동안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을 못 본 척하고 현관을 열자 형광등의 싸늘한 빛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글도 못 쓰는 주제에 이대로 집에 처박혀 쓰레기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용감하게 현관 밖으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 내가 앓거나 죽어가거나 상관없이 날씨는 시시각각 바뀐다. 매일 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졌지만 전날보다 덜 차갑거나 더 축축하기도 했다. 채울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빈 채로 남겨져 있는 희멀건한 원고지들에 비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바꿀 수 없는 건 차라리 편했다. 


하필이면 모든 벤치가 전부 더럽거나 사용중이었다. 근처 어린이집에서 야외활동을 나온 듯 내 허벅지 즈음에나 올까말까한 조그만 아이들이 꺅꺅 고성을 지르며 뛰고 있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유아의 활동량을 버텨낼 수 없는 듯 비슷한 청바지에 같은 연갈색 가디건을 걸친 선생들은 모두 젊은 여자였다.



“아!”

“…아.”

“…으, 아아앙!! 아파아…!”



뛰다 말고 내 다리에 된통 부딪혀 넘어진 아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내 허벅지가 욱신거릴 정도니 아이가 우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재빨리 쪼그려앉아 아이부터 일으켜세웠다. 내가 무언가 하기도 전에 놀이기구 근처에서 급하게 달려온 연갈색 가디건이 내 대각선 즈음, 아이의 옆에 낮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원이 넘어졌어? 우리 서원이 열심히 뛰다가 넘어져서 속상하겠네.”

“선째니이… 아파요….”

“아파? 어디 아픈지 선생님이랑 같이 볼까?”



시야가 짧았다.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는 선생은 그냥 옷이 좀 많이 헐렁할 뿐인 남자였다. 아이와 함께 단풍잎만한 손바닥을 뒤집어 확인하고 병아리처럼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의 관절을 확인하더니 이상이 없자 안도하는 표정으로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서원이 이제 기린반 선생님이랑 미끄럼틀 탈까? 아이는 꽃봉오리처럼 동그랗고 빨간 볼에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 그대로도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글방글 웃으며 네에! 하고 기운차게 대답했다. 조그만 몸을 한번 꼭 안아준 남자가 아이를 내려놓자 아이는 자그만 발로 미끄럼틀을 향해 토닥토닥 달려갔다. 나는 그제서야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 저 애 말인데요….”

“서원이요?”

“네. 그, 애가 혼자 넘어진 게 아니라 저랑 부딪힌 건데… 넘어졌다고 하셔서….”

“돌에 걸려 넘어지나 지나가는 사람 다리에 부딪혀 넘어지나 그게 그거죠 뭐. 걱정되셔서요?”

“당연하죠. 저렇게 작은데 다치기라도 했으면.”

“친절하시네요. 아이가 와서 들이받으면 애한테 화 내는 분들도 많은데.”

“저만한 애가 있어도 안 이상할 나인데 무슨….”



유난스러울 만큼 큰 연갈색 가디건 소매를 접으며 하하, 웃은 남자가 짧은 혀로 선생님을 부르는 유치원생에게 다시 달려간 뒤 나는 흙발자국이 난 벤치 위에 그대로 앉았다. 바지쯤이야 더러워지면 어떠냐 싶을 만큼, 공원 전체가 사랑에 차 있었다. 환하게 흩어지는 햇빛과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들과 작은 발자국들과 부산스럽게 아이들을 부르는 젊은 목소리들. 나는 선생들이 한 떼의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빠져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곳에 앉아 남은 생기의 부스러기까지 전부 긁어모았다. 쌀쌀해진 바람이 나무를 실컷 흔들며 지나가는 서슬에 움츠린 목 위로 떨어지던 낙엽이 와서 붙었다. 그게 우스워서 웃음이 났다. 실로 며칠만에 이리도 자연스럽게 웃었던 건지.







그날도 글은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책상 아래로 들어가 연필을 주웠다. 상습범답게 순식간에 다섯 개의 연필이 다시 연필꽂이로 돌아왔다. 흰 종이는 여전히 막막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훨씬 나았다. 그 다음날은 불을 켜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종량제 봉투를 버리러 나온 길에 마침 어제의 그 시간 즈음인 걸 깨달았다. 겸사겸사, 같은 핑계를 대며 나는 그 길로 공원을 향했다. 뛰어노는 아이들 대신 드문드문 운동하는 중년들이나 전화를 하는 젊은이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시간 가량을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기사, 이런 날씨에 그런 어린애들을 데리고 매일 나올 수는 없겠지. 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일부러 보러 나온 게 아닌데. 그냥 쓰레기 버리는 김에 잠깐 나온 것뿐인데.







금요일엔 일부러 중무장을 하고 나섰다. 갈 곳은 없지만 갈 수 있는 곳은 많을 테니까. 그래도 제일 먼저 공원에 들렀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니 할 거라곤 놀이기구에서 조금 떨어진 운동기구를 삐걱거리는 것뿐이었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멀찍이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사이클에 멍하니 앉아있다 말고 고개를 들어 공원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예의 연갈색 가디건 두어 명이 둘씩 짝지어 손을 잡은 유아들 앞뒤로 걸었다. 말 잘 듣는 병아리들 한 무리는 놀이기구 근처에 도착해 무언가 주의사항을 알려 주는 선생에게 입을 모아 기운차게 대답한 뒤에야 주변으로 부산스럽게 흩어졌다.


이상하리만치 큰 가디건을 입은 금빛 뒤통수는 오늘도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이 저런 머리를 해도 되나, 하고 뻘한 생각을 하며 나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만 아이가 놀이기구들이 설치된 우레탄 바닥을 벗어나 보도블럭으로 포장된 길을 또박또박 걸어나오자 그 남자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아이보다 조금 큰 보폭으로 옆을 걸어 앞을 가로막고 연갈색 가디건이 흘러내리는 팔이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 몇 번 추켜 주던 그가 아이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가 웃어 보였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것도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몇 걸음 걷고 우레탄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가고 그는 느릿느릿 가디건 소매를 접어올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차분히 뉘어져 있던 옅은 노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새싹처럼 허공으로 번쩍 솟아올랐다. 오후의 햇살은 눈이 부셨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아주 천천히 다시 내려앉았다. 연갈색 소매 위의 손가락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웃는 듯 작게 들썩이는 어깨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려 쪼그려앉는 다리 같은 게 모두 느렸다. 마치 나만이 그에게서 유리되어 다른 시간을 갖게 된 것처럼.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짧은 부팅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원고지를 펴고 연필을 들었다. 두렵긴커녕 머릿속에 차오르는 글자들을 손이 따르지 못해 답답할 정도였다. 부팅이 끝나자마자 로딩도 필요없는 메모장을 켜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렸다. 그 동안의 슬럼프가 무색하게 문장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손이 시큰거려 그만뒀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메모장에 써 놓은 글은 거의 중편 소설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퇴고하며 절반을 쳐낸대도 이 정도면 마감 기한까지 제출해야 할 분량쯤은 될 테다. 빈 곳은 하얗고 채워진 곳은 검은 화면이 무섭긴커녕 사랑스럽고 반가웠다. 아무 것도 쓰지 못했던 게 겨우 몇 시간 전인데도.







매일같이 공원에 나갔다. 꽤 이른 시간부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느즈막한 시간까지 계속 앉아 있기도 했다. 유치원생들은 매일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나오는 날에 그는 반드시 따라나왔다. 음침하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다가서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물며, 남자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못 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글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차이더라도 그건 아주 나중이어야 했다. 연갈색 가디건의 걷어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흰 손목이 유아의 조그만 손에 붙들려 작게 흔들리는 것을 보다 나는 공연히 들고 나온 노트북 위로 머리를 푹 숙였다. 차이게 될 걸 알아도, 당장의 떨리는 마음은 내가 주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차피 망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 쉽게 부풀었다. 설탕 한 숟가락이 거대한 솜사탕이 되는 것처럼.



당연히 마감은 순조로웠다. 데드라인이 한 번 연장된 이후 엄청난 분량을 한 번에 내놓고 그것도 모자라 빠르게 비축분을 쌓는 나를 보며 편집부는 혀를 내둘렀다. 생에 기억하는 순간 내내 글을 읽고 써왔지만 요즘처럼 글 쓰는 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잠도 깊이 자고 밥도 잘 먹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세상이 얼마나 달고 푹신한지 처음 깨달은 나는 매일의 기분을 즐기며 보냈다. 







그러다 터질 일이 터졌다. 유치원생들이 노는 곳에 얼쩡거리는 성인 남자라니, 신고당해도 할 말이 없는 위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볍게 연행될 줄은. 평생 연이 없던 곳이다보니 직업병으로 나도 모르게 유심히 관찰하다가 서류철을 책상 위로 탕 내리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꽤나 온화하던 경찰의 표정은 이미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선생님, 훈방조치라는 게 잠깐 앉아 계시다 그냥 가는 게 아니거든요."

"죄송합니다."

"요즘 세상이 좀 험하니까 주의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지요. 애들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당황하시겠어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억지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요주의 인물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경찰서 문을 나오며 나는 차라리 병아리를 키울까, 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생각을 했다. 말마따나 아무 상관도 없는 어린애들을 굳이 보러 다녀서 위협을 줄 수는 없으니까. 문득 아이를 번쩍 안아들던 팔이 생각났다. 헐렁한 니트 소매를 계속해서 걷어올리던 손이라든지, 밝게 웃는 얼굴 같은 것도. 아이처럼 유난스럽게도 환한 그 미소. 하지만 나는 그가 어느 어린이집의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 공원의 근처 어딘가려니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삐약삐약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공원의 시설물처럼 앉아 있기만 했더니 정말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대화 한 번 해본 게 전부니까. 나는 힘없이 터덜터덜 공원 입구를 지나쳤다. 가로질러 가는 편이 집에선 가까웠지만 신고당하고 나오는 길에 또 들를 만한 간담은 없었고, 집에 일찍 갈 필요도 없으니까.


이제 그를 또 보기는 힘들겠지. 바보같이 얼쩡거리지만 말고 진작에 뭐라도 좀 할걸. 오랜만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바닥만 보고 터덜터덜 걷다 보니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스스로를 비난하며 방향을 틀려던 그 순간 요 며칠 귀에 익숙해진 어린애들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홀린 듯이 발을 옮겼다. 꽤 오래 된 아파트단지 부속 상가의 삼 층에 ‘새봄 어린이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혹시 여기일지도,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린이집 창문에 붙은 안전창살 너머로 조그만 손이 내밀어졌다. 당황한 사이 누군지 모를 유아가 뭔지 모를 것을 창 너머로 떨어뜨렸다. 가을이라 화단의 풀들이 누렇게 시든 게 다행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화단의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아이가 떨어뜨린 걸 찾았다. 특별히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눈앞에서 떨어진 이상 찾아 주기는 해야 할 테니까. 


다행히 허전한 화단에서 지갑을 줍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색 반지갑을 펼쳐서 신분증을 확인하기도 전에 머리 위의 나무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눈앞으로 툭 떨어졌다. 거대한 벌레나 고양이, 그도 아니면 쓰레기 정도일 줄 알았던 물건의 정체는 까만 휴대폰이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버튼이 눌렸는지 화면이 밝게 들어와 있었다. 무의식중에 내려다본 화면에는 어린이들 두엇과 함께 금발머리의 젊은 남자가 찍힌 사진이 있었다. 나는 반사행동에 가깝게 급한 손으로 지갑을 펼쳤다. 까만 머리카락에 조금 탄 피부였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 맞았다. 권순영. 이름이 권순영이구나. 날카로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가도 입술을 양 옆으로 가늘게 늘리며 눈을 접어 웃어 보이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권, 순, 영….”



나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소리내 읽었다. 이름이 혀 끝에 둥글게 감겼다. 그래도 짝사랑 마지막엔 이름도 알게 되고 나쁘지 않네.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공중에 뱉어 놓고 나는 화단을 나와 계단을 올랐다. 돌려주는 김에 얼굴도 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철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만요! 하고 젊은 남자 목소리가 났다. 아이들을 달래 안쪽으로 들여보내는 듯 잠시 실랑이를 하더니 뒤늦게 열린 문 너머에는 설마 했던 권순영이 연갈색 가디건 대신 분홍색 앞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사나울 만큼 꼬리가 치켜올라간 날카로운 눈이 어린애처럼 둥글게 커진 채 몇 번 깜박거렸다.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사람처럼. 그가 이렇게까지 당황할 줄 몰랐던 나는 허둥대며 들고 있던 지갑과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 이거, 아까 애들이 밖으로 던지길래 주웠는데요….”

“어, 어, 네?! 네, 아, 이거 제 껀가요?”



지나칠 만큼 놀라고 당황한 모습 탓에 나까지 인사를 잊었다는 건 깨닫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권순영은 황급히 내 손에서 지갑과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자기 물건임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기분에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이 이런 모습인 건 좀 아쉬웠지만 세상 좁은데 언제 한 번쯤은 또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자위하며 돌아서다 팔을 붙들렸다.



“감사합니다. 애들이 던진 줄도 몰라서… 하마터면 이대로 잃어버릴 뻔했어요.”

“찾아서 다행이네요.”

“그, 그래서, 저기, 밥 살게요!”

“네?”

“밥, 커피, 아이스크림 뭐든 말만 하세요! 사드릴게요!!”



엄청난 결심이라도 되는 듯 까만 눈을 번쩍이며 나를 다시 가까이 당긴 권순영이 방금 내가 건네 준 휴대폰을 다시 내게 내밀었다. 흰 편이던 얼굴이 운동장 여섯 바퀴는 돈 것처럼 새빨갰다. 나는 권순영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찍었다. 저장 버튼을 눌러 주소록에 이름까지 적으려다 괜한 설레발 같아 관두고 통화 버튼을 눌러 내 휴대폰에 번호가 뜨게만 하고 돌려줬다. 권순영은 여전히 내 팔뚝을 붙든 채 서있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이름, 이름이 뭐예요? 저장할게요.”

“전원우요. 전원 버튼 할 때 그 전원, 하고 우.”

“저는 권순영이요. …혹시 내일 바쁘세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권순영이 먼저 줄줄이 늘어놓았다. 오늘은 당직이라 늦게 끝나고, 내일은 여섯 시면 퇴근한다나. 내일 바쁘다고 했다간 울 기세다. 익숙한 감정, 익숙한 기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짝사랑의 온도가 붙잡힌 팔을 타고 전해져 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더 부풀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마음이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일 저녁 사 주세요. 같이 밥 먹어요.”



위치가 조금 낮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얼굴이 솔직하게 기쁨을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면 같이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데. 팔을 쥐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이 풀리더니 이내 아래로 내려와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내일 만나요.”



권순영이 방그레 웃었다. 내가 처음 반했던 순간처럼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