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쿱솔] 데이트 (솔른웹진 V log 제출작)
대체로 눈이나 서리, 하다못해 진눈깨비조차도 아주 늦은 가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하릴없이 부쩍 차가워진 계곡물 위로 작은 눈송이 하나를 떨어뜨려 녹이기를 반복하는 승철의 무릎 위로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이 살금살금 올라앉았다. 관심을 끌려는 듯 빙글빙글 몇 번 돌며 존재감을 알린 빛이 이내 형태를 갖추어 승철의 품에 폭 안겼다. 곱슬거리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승철의 뺨에 부비며 한솔이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늘어지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나 보고싶었지이-"
"어. 완전."
"그런데 왜 이렇게 반응이 싱거워?"
"…한솔아, 우리 몇 시에 만나기로 했었지?"
"정오에…."
"지금이 정오야?"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한솔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정령에게 인간의 시간이 별 의미가 없다 해도 여름에 제가 떠난 뒤로 처음 보는 날 이렇게 대판 지각을 해서야 면목이 없을 수밖에 없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못했다고 웅얼거리는 한솔을 추켜안은 승철이 그제서야 맨질맨질한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부쩍 기울어진 햇빛에 속눈썹 그림자가 길었다. 뭐 하다 늦었어. 목소리는 엄하지만 한솔의 어깨 위에 얹힌 얼굴은 흐물흐물 녹은 채다. 한솔은 대답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었다. 승철이 저를 혼낼 생각이 아니라는 건 숨소리만 들어도 아는 탓이다.
"일하면서 뭐 재밌는 거 없었어?"
"재미, 보단… 나… 해고당하면 내년부턴 뭐 하지…."
"해고? 정령이 해고도 당할 수 있어?"
"사람들이 여름 햇빛 싫대. 따갑대."
"원래 사람들은 겨울 되면 여름 기다리고 여름 되면 겨울 기다리고 그래. 나 일할 때 되면 다들 너 찾고 있을 걸."
"그래도오."
퍽이나 서운했는지 답잖게 칭얼거리며 허공에 마른 다리를 몇 번 휘저은 한솔이 이내 한숨을 푹 쉬고 승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힘을 완전히 빼 버린 몸이 가벼울 턱이 없는데도 승철은 오히려 팔을 움직여 요람처럼 한솔을 느릿느릿 흔들며 웃었다. 여름햇살의 정령답게 금세 웃음을 터뜨린 한솔이 별 의미 없이 승철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꼬았다. 햇빛을 받을수록 금빛으로 빛나는 제 머리카락과 달리 빛을 전부 삼켜버릴 것처럼 새까맣기만 한 승철의 머리카락은 조금 차가웠다. 그야, 겨울이니까. 품은 따뜻해도 머리카락 정도는.
갓 내린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승철의 볼이 둥글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까만 눈동자는 웃느라 접힌 눈꺼풀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여름 내 서운했던 것들이라봤자 그게 전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하는 건 즐거웠다. 함박눈의 정령인 승철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건 서운했지만 무한에 가까운 정령의 삶에서 그쯤이야 애틋함을 깨우쳐주는 정도일 뿐이고. 잊어버리고 있던 걸 그제서야 깨닫고 내내 제 침대처럼 누워 뒹굴던 승철의 품에서 벌떡 일어선 한솔이 승철을 잡아끌었다. 가자, 데이트 하러.
인간의 몸을 갖는 게 금기는 아니었지만, 인간의 모든 단위─가까이는 시간부터 중요하기는 금전까지─를 초월한 정령에게 형태를 갖춘 육체란 그다지 쓸모있는 것이 아니어서, 승철과 한솔처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나 굳이 번거로운 노력을 기울여 만들곤 했다.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네 어쩌네 해도 아직은 세상이 너무 즐거운 어린 정령들은 둘 모두가 쉬는 봄이나 가을 즈음엔 굳이 인간들 사이에 섞였다. 에너지가 넘치는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이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 곳으로나 뛰어가다 승철에게 따라잡혀 위로 번쩍 들어올려진 한솔이 소리내 웃었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아?"
"데이트라서 좋은 거거든. 혼자 노는 거 재미 없어."
"그러게. 재미 없더라."
"와, 나 일하는 동안 혼자 꿀 빨고 놀았다구?"
"너 계속 그렇게 삐질 거면 겨울로 이직해."
애초에 사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정령이 이직이 가능할 턱이 없으니 농담일 뿐이지만. 그제서야 한솔의 두 발이 땅에 닿도록 내려 준 승철이 한솔의 손을 쥐고 천천히 걸었다. 가을 햇볕이 그나마의 기세도 슬슬 줄이는 중이었다. 폭염에 익숙해진 한솔은 쌀쌀한 바람에 몸을 조금 떨며 밝은 색 눈동자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번화가에서도 변두리 쪽인지라 길은 한산했다. 슬슬 자리 옮길까? 한솔이 속삭였다. 물론 정령들이 머무는 보금자리로 가자는 말은 아니었다. 장난기가 많은 승철도 이런 것엔 짓궂게 굴지 않는 편이어서 둘은 곧장 가장 가까운 숙박업소의 문을 열었다. 기껏 힘든 과정을 거쳐 얻어낸 몸이니 꼬박꼬박 잘 써먹곤 있지만, 그래도 역시 정령왕이 알게 되면 뒷목을 잡고 넘어갈 일이다. 인파에 섞여 혹시나 지나치고 있을지 모를 다른 정령들을 피해 굳이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온 것은 그 이유였다.
여름 내 사람의 문명을 익혀 둔 승철이 계산을 하려는 동안 옆에서 맹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던 한솔에게 카운터 직원이 말을 걸었다. 학생, 어려 보이는데 미성년자는 아니지? 한솔은 대답 대신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서였지만, 직원은 되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한솔이나 승철이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한솔이 유독 앳된 게 눈에 걸렸다. 가출한 청소년일지도 몰라. 정의로운 직원은 승철을 외면하고 한솔에게 과장스러울 정도로 상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학생, 부모님은 이 사람 아셔? 한솔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몇 번 깜박거리기만 하다가 승철의 옷소매를 꾹 쥐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빠르게 불투명한 문을 밀고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등 뒤에서 직원이 당황스런 목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지만 한솔은 승철을 잡은 채 한참을 달렸다.
꽤 멀리까지 뛰어와서야 발을 멈춘 한솔이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여전히 승철의 소맷자락을 힘껏 움켜쥔 채였기에 승철은 허리를 조금 굽힌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번화가는커녕 주택가도 끝나가는 변두리였다. 근처에 등산로 입구가 있는지 드문드문 등산복을 입은 중년들이 기운찬 발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승철이 한솔의 손을 붙들고 다시 일으켜세우며 물었다. 대답을 들을 생각이라기보단 그저 어이가 없어 한 말에 가까웠다.
"그냥 뛰다 보니까 뛸 수 있는 곳까지 뛰어 보려고…."
"……체력 낭비도 여러 가지다, 진짜."
"아, 아파! 진짜 아파! 온 김에 여기서 놀면 되잖아!!"
엉덩이를 털어 주는 건지 때리는 건지 모를 손을 피하려 한솔이 폴짝폴짝 정신사납게 뛰었다. 손을 놓자마자 등 뒤로 찰싹 달라붙는 게 어지간히 아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승철의 허리를 꼭 안고 매달린 한솔이 두툼한 어깨에 뺨을 부비적댔다. 별로 힘들지도 않으면서 괜히 뭐라고 그래…. 지적할 말은 많았지만 승철은 일단 등에 한솔을 매단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늦은 시간에 지도 하나 없는 승철과 한솔이 믿을 거라곤 정령으로써의 감 뿐이었기에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들어가면 누구라도 있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이었으나 막상 들어선 곳은 등산로보다는 산책로에 가까운 길이었다. 허리를 힘껏 껴안은 한솔의 팔을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건 조금 나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승철은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정령과 눈이 마주쳤다. 드물게 꽤 또렷한 형상을 갖춘 채였던 단풍의 정령이 반갑게 활짝 웃으며 승철과 한솔을 향해 날아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봄 가을만 되면 여기저기서 목격된다는 사랑꾼들 아냐?!"
"왜 하필 여기로 온 걸까…."
"야, 나도 너는 별로 반갑지 않거든. 우리 한솔이 잘 있었어? 오늘도 아주 귀엽네~"
승철의 한숨에 되려 팩 쏘아붙인 정한이 손가락 한 마디 크기나 될까말까한 얼굴을 한솔의 이마에 붙였다 뗐다. 너 임마 저리 안 비켜? 승철이 몸을 틀어 한솔을 제 품으로 감싸며 날파리를 쫓듯이 팔을 휘휘 저었다. 그래봤자 무게와 밀도를 가진 손은 정한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지만. 막상 뽀뽀까지 당한 한솔은 오래 전에 체념한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하고 나즈막하게 인사했다. 시원하게 웃어보이며 정한이 손을 흔들자 빛이 설익은 활엽수들의 나뭇가지가 덩달아 서걱거렸다.
"그런데 진짜로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쯤 어딘가에서 그렇고 그런 거 하느라 정신없을 시간 아냐?"
"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하루이틀도 아니면서 남들이 모를 줄 알았어?"
"너야말로 진작 쉬러 갔을 시간 아냐? 게으름뱅이가 웬일."
"할 때 부지런히 해야 나머지 계절에 편하게 쉬지. 요즘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계속 일해."
고운 적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정한이 투덜거렸다. 승철과 정한이 대화하는 사이 슬쩍 떨어져 나온 한솔이 이르게 떨어진 낙엽들을 줍다 말고 코를 훌쩍였다. 예민하게 기색을 알아챈 승철이 얇은 겉옷이나마 벗어 한솔의 어깨에 둘러 주며 정한에게 물었다. 근처에 쉴 만한 곳 있어? 정한은 잠시 생각하다 아, 하고 조그만 손가락을 튕겼다. 따라와, 오늘 기분 좋으니까 내가 선심 쓴다.
"…너무 본격적이지 않아? 자다가 주인 오면 쫓겨날 것 같은데."
"야, 이 먼지 좀 봐. 주인은 여기 안 온 지 한참 됐어. 하루쯤 써도 모를걸?"
"잘 됐다. 나 이렇게 천막 쳐놓고 자보고 싶었는데."
아닌게아니라 정한이 가스버너 위쪽을 훅 불자 먼지가 바람처럼 휘날렸다. 먼지 탓에 콜록이며 기침을 하는 승철 뒤에서 곱게 개인 이불을 뒤적이며 한솔이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정한은 뿌듯하게 거 봐, 한솔이도 좋다잖아! 하고 웃었다. 승철은 기침 탓에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일단 한솔이부터 이불에서 떼어 놓았다. 먼지 털고 만져. 한솔은 고분고분 뒤로 물러서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먼지를 털 이불을 챙겨드는 승철의 옆에서 정한이 자연스럽게 텐트의 벽을 넘어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이 쩌렁쩌렁 외쳤다.
"귀 막고 잘 테니까 뜨거운 밤 보내!!!"
"야!!!!"
승철이 헐레벌떡 텐트 밖으로 쫓아나갔으나 정한은 이미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방해도 가지가지다. 텐트 안에서 한솔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눈치를 봤다. 이불 꺼내올까? 동그란 눈이 느릿느릿 깜박였다. 승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솔은 그대로 텐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쪽에 있던 손에서 이불이 질질 끌려나왔다. 흙바닥에 이불 끌면 안 돼. 승철이 주의를 주자 한솔은 허겁지겁 얄팍한 이불을 양 팔로 돌돌 말아올렸다. 마침내 추운 나라의 의복 장식처럼 손목에 동그랗게 감긴 이불을 한솔이 난감하게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있으면 승철이 해결해줄 테지만 그래도 산 세월이 얼만데, 늘 이런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이리 줘. 승철이 웃었다. 한솔은 머쓱하게 팔을 내밀었다. 승철이 이불 뭉치에서 한솔의 팔을 한 쪽씩 빼 주고 엉덩이를 툭툭 쳤다. 가서 다음 이불 가지고 나와. 한솔이 조금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으면 잠이 올 법도 한데, 한솔은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였다. 덕분에 얕은 잠에서마저 금세 깨 버린 승철이 몸을 틀어 한솔을 꼭 끌어안았다. 잠이 안 와? 자다 깬 목소리가 낮았다.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철은 한솔을 안은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팔을 뻗어 코알라처럼 승철에게 찰싹 달라붙은 한솔이 푹 안긴 채로 체온을 들이마셨다. 여름 내 그리워하던 승철이 눈 앞에, 한솔의 두 팔 사이에 있다. 보고 싶었어. 한솔이 중얼거렸다. 승철은 대답 대신 마른 등을 토닥였다. 승철이라고 연인이 그립지 않았을 리가 없다. 비는 시간 내내 굳이 사람의 육체까지 갖춰 가며 인간 틈에 섞여 문명을 익힌 건, 거침없이 내리쬐는 한솔의 햇빛만이라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여름이 끝나면, 겨울이 오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내일은 놀이공원 가자."
"갈래."
"하루 종일 손 잡고 다닐래."
"좋아."
"구슬 아이스크림 먹자."
"츄러스도."
"내일 해 뜨면."
"내일부터."
가슴을 마주 댄 채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오늘 하루쯤, 지나고 나면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될 뿐인데 속상해하기엔 역시 좀 아까웠다. 이미 긴 시간을 함께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이 남았으니까. 이미 지난 오늘의 해처럼, 내일도 다시 해가 밝을 것이다. 다시 길을 걷고, 몰래 입을 맞추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새로운 날을 보낼 수 있을 내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