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

YOU make me feel like i'm ALIVE (윤홍웹진 PLAYLIST 참여글)

배제 2018. 12. 30. 00:30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세상은 환했고 큼직한 유리창 밖은 눈이 부시게 빛이 났다. 내 옆에 서 있던 이가 그게 '낮'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밝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른 오후의 햇볕을 받으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는 분명 이 사람을 알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윤정한. 성은 윤이고, 이름은 정한이야. 정한이라고 불러."

"정한이?"

"…응, 그렇게 부르면 돼."

"정한, 이, 야."

"정한아, 라고 해야지. 네 이름은 알겠어?"

"홍지수."


 


맞아, 지수야. 나의 사랑스러운 지수. 정한이 중얼거리며 나를 껴안았다. 촉각이 예민하지 않아 느껴지는 건 온도 정도였지만 포옹은 퍽 부드럽게 느껴졌다. 뒷머리를 토닥이고 뒷목을 가볍게 쓸고 지나간 정한의 손이 뺨에 닿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팔을 벌려 정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당겨 안으며 침대 아래로 발을 딛게 도왔다. 아, 나도 모르게 목 안쪽에서 불협화음처럼 소리가 튀었다. 바닥을 처음 디딘 발목이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렸다. 그러나 정한은 나를 다시 침대에 앉히는 대신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괜찮아. 정한의 목소리는 한낮의 햇볕처럼 부드러웠고 나는 최선을 다해 정한의 말을 따랐다. 달팽이처럼 느린 발로 마침내 현관 바깥을 처음 디뎠을 때쯤에 드디어 나는 혼자서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아…."

"마음에 들어?"

 



걷기가 어려워 불안정하게 비틀대면서도 내가 낮을 향해 걸어나가자 정한은 내 팔을 잡고 걸음을 도왔다. 천천히, 천천히. 겨우 몇 걸음 더 걸어나간 내가 부드러운 풀밭 위에 주저앉자 정한도 내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이건 패랭이꽃, 이건 델피니움, 이건 은방울꽃, 저건 천수국…. 붉거나 푸르거나 노랗거나 흰 꽃들이 희고 가느다란 정한의 손끝에서 허리가 뚝뚝 분질러졌다. 낮은 봄이야? 꽃을 받아들며 내가 묻자 정한은 아하하- 하고 끝을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낮은 시간이고, 봄은 날짜. 지금은 낮이지만 봄이 아냐. 오늘은 12월 30일. 네 생일이야."

"생일? 그렇구나. 오늘이 12월 30일이면, 지금은 겨울이야?"

"맞아. 우리 지수는 똑똑하기도 하지."

 

 


풀물이 든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흰색 토끼풀꽃을 또 한움큼 뜯어낸 정한이 줄기를 엉켜 길고 통통한 줄처럼 만들었다. 괜한 꽃잎만 손끝으로 으깨다 몇 송이를 빼앗겼다.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수고를 기울인 것도 아니기에 별로 아쉽지는 않았지만 당장 손에 쥘 게 없어 정한의 소매를 붙들었다. 온갖 색이 들어 지저분하게 얼룩덜룩한 내 손이 상앗빛 소매에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옷을 더럽히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토끼풀로 만든 희고 토실토실한 줄 사이사이에 화려하고 작은 꽃송이들을 꽂고, 마침내 줄의 양끝을 서로 연결해 관처럼 둥글게 만들었다. 이리 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말이 나를 향했음을 직감하고 상체를 바짝 당겨 붙였다.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정한은 희고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윤- 이라고 부르면 입술이 닿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다만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화관이 내 머리 위에 얹히는 가볍고 푹신한 감촉과 손등과 뒷목을 데우는 오후의 햇볕, 모가지를 뜯긴 식물들의 피처럼 생생한 풀비린내와 입술 위를 스치던 정한의 숨이 내 생의 첫 기억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립하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정한은 내 방을 완전히 정리해 주었다. 뻣뻣하고 미끄러운 비닐 시트 대신 보드랍고 푹신한 침구를 깐 침대에는 그가 먼저 누워 뒹굴었지만 나는 타박하는 대신 소각용 봉투에 비닐 시트를 구겨넣었다. 청소에 있어서 윤정한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는 것쯤은 짧은 경험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어려운 공구 같은 것들은 진작에 창고로 치워졌고, '비상용'이라던 가볍고 흔한 도구 몇 개만이 정한의 방으로 옮겨졌다. 정한은 나를 견고하게 잘 만든 자신의 솜씨에 자부심 같은 걸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잔고장 한 번 난 적이 없었고 아마 장비들이 전부 치워진 것도 그래서일 테니까. 그 이상 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고칠 수 있는 내 상처라곤 가볍게 긁힌 피부에 경화제를 발라 다시 매끈하게 다듬는 정도였다. 큰 창문에 한가득 여름 햇빛이 들어차자 정한은 숫제 베개 아래에 머리를 파묻은 채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잘 거면 네 방 가서 자면 안 될까? 내 방은 환해서 낮잠 자기 힘들 텐데."

"청소하는 동안 여기 있을래."

"나가라는 뜻인데, 정한아."

"싫다고, 지수야."

 

 


저걸 그냥 번쩍 들어올려 방 밖으로 내동댕이치려다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어 관뒀다. '내동댕이'라는 단어는 어제 배웠다. '내팽개치다' 보다 덜 나쁜 어감에, '던지다' 보다는 무거운 단어. 내동댕이가 뭔지 보여주겠다며 나를 들어올려 침대로 던진 게 어제였다는 말이다. 어차피 침대는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나는 그를 그대로 두고 청소기를 작동시켰다. 둥글넙적한 기계가 바닥보다 조금 높은 곳을 돌아다니며 부스스한 먼지들과 거칠고 반짝이는 모래들을 집어삼켰다. 나도 정한도 늘 맨발이었기 때문에 발을 아무리 털고 들어와도 바닥은 늘 흙먼지가 조금쯤 묻어 있었다. 정한아. 내가 부르자 그는 베개 아래 푹 파묻고 있던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희멀건 얼굴이 그림자 속에서도 하얬다.

 

 


"신발이라는 거, 만들 줄 알아?"

"아는데… 안 신고 싶어."

"그럼 청소 네가 해."

"싫어!"

"나가. 당장 나가 이 웬수야."

 

 


들고 있던 먼지털이로 이불 위를 팡팡 내리치자 정한은 괜히 찡찡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가느다란 막대에 깃털 몇 가닥 붙인 게 아파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조슈지 너무해애, 하고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침구 더미 속에서 우는 소리를 하는 게 퍽이나 안쓰럽긴 해서 손을 거뒀다. 그제서야 느릿느릿 이불 틈으로 내밀어지는, 꼬리가 둥글게 처진 큼직한 눈이 조금 발갰다. 지수야. 면과 솜으로 푹 둘러싸여 정한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다.

 

 


"지수야, 신발 주면 어디 갈 거야?"

"…? 가? 어딜?"

"묻잖아. 어디 가려고 신발이 필요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에 간다니, 그는 내가 이곳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정한이 집을 둘러 널찍하게 쳐 놓은 울타리 바깥에 내 관심을 끌 만한 거라곤 없는데. 울타리는 내 무릎까지도 오지 않았고 아주 낡기까지 했다. 삭아서 떨어져나간 널빤지 틈으로는 토끼나 다람쥐 따위가 기웃거렸고 대담한 사슴들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덜 자란 뿔로 관목을 헤집으며 검은 눈으로 나를 흘긋거렸다. 손에 과일 같은 걸 들고 있으면 가까이 다가와 주둥이를 들이밀기도 했다.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은 정한이 넣어 준 단편적이고 얕은 것들뿐이었지만, 이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없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윤정한은 내게 늘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만을 쥐어 주려고 애썼으니까. 울타리를 넘나드는 짐승들 중엔 여우도 있고 고양이도 있었지만 핏자국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바닥이 더러워져서 하는 말이잖아. 청소를 해도 해도 흙이 나와."

"청소는 청소기한테 하라고 하면 되잖아."

"전기는 땅 파면 나오고? 내가 쓰는 것만 해도 얼만데 그것까지 낭비를 해."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부족하면 내가 발전기 옆에서 자전거라도 탈게. 응?"

 

 


이불 속에서 비져나온 팔이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나는 정한의 이런 모습에 약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연약한 목소리나 젖은 눈이나 헌신을 약속하는 말 같은 것. 윤정한이 나를 소중하게 여길 때마다 나는 매 시간 물러져 간다. 말랑말랑한 거라곤 정한이 골격 위에 덧붙여 준 완충재뿐이면서. 못 이기는 척 침대맡에 주저앉자 정한은 곰질곰질 내 허벅다리 위로 머리를 얹었다. 커튼도 갈아야 하고, 비닐 시트도 버려야 하는데. 여름이 거진 끝나 미지근해진 바람이 조금 열린 창 너머로 새어들어와 정한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게 좋았다. 감도가 개선된 피부 위로 느껴지는 체온도 좋았다. 정한이 잠들고 나면, 너무 많이 닦아 반질반질해진 시트 같은 건 그 때나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느리게 정한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여러 번의 가을과, 겨울과, 봄과, 여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정원─과연 다 쓰러져 가는 울타리 안쪽 정도를 정원이라고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차치하기로 하고─을 드나드는 동물들에게 말을 거는 법을 익혔다. 작고 단단한 뿔을 가진 암사슴은 내가 무거운 머리를 기대도 신경질을 내지 않고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능금을 으적으적 씹기만 했다. 잘 익은 밀이나 보리 따위의 줄기를 손으로 훑어 손바닥 위에 밀알을 올려 두면 간간히 겁 없는 새들이 와서 앉곤 했으며 다람쥐는 내가 아침 일찍 바깥에 나오지 않으면 창틀에 올라와 조그맣고 딱딱한 손으로 창을 두들겼다. 실수로 정한의 창을 두드렸는지 정한이 창문을 향해 베개를 집어던져 창 아래의 화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 도대체 설치류 따위가 왜 그렇게 똑똑한 거야? 연녹색 완두콩 껍질을 까며 정한이 투덜거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까던 콩을 한 알 집어 정한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 장난스럽게 앙, 하고 가볍게 목 뒤를 울리며 정한이 내 손끝을 물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느리게 부분부분 거죽을 다시 입힌 살갗들은 이제 정한의 말대로라면 '평범한' 수준까지 감각할 수 있었다. 끌어안았을 때의 체온이며, 마른 팔이 안쪽으로 오므라들 때의 약한 압박감까지. 이제는 피부가 긁힐 때 따끔한 감각마저도 느껴졌다. 물론 여전히 가벼운 스크래치 이상의 부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경화제를 문지른 뒤 굳히기만 하면 될 정도의 작은 상처에도 종종 정한을 찾곤 했다. 

 

 


"잇자국이 났어."

"어디 봐."

 

 


정한은 이가 조금 날카로운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에 비해 그렇다는 거다. 내 이는 정한이 심혈을 기울여 아주아주 둥글고 매끈하게 연마한 거니까. 원래는 앞니가 조금 더 컸었다. 연마기를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가느다란 손가락에 거친 천을 감고 내 이를 다듬어 준 정한이 오래 전에 상처가 다 나아 도로 희어진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가져갔다. 콩은 입에 넣기만 하고 씹지를 않아 가볍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얕게 흔적이 남은 내 손가락을 정한이 천천히 쓸었다. 귀애하는 것을 어루만지는 듯, 안타까울 만큼 다정히 매만지는 손은 몸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열을 피우곤 했다. 나는 바람결에 흐트러진 미모사처럼 손을 움츠렸다. 손가락 한 마디 이상 차이가 나는 작고 흰 손에서 내 손은 쉽게도 빠져나왔다. 정한은 당황한 듯 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비어버린 제 손을 보다 양 손을 전부 상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나는 콩 껍질을 한움큼 든 채 현관을 나섰다. 갈색의 통통한 꼬리가 재빠르게 울타리 너머 풀숲으로 사라졌다. 꽃밭을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인 토끼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날따라 정원은 적요하기만 했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아직 생기가 남아 촉촉한 콩껍질들이 떨어지며 타닥 소리를 냈다. 나는 콩깍지의 비린내가 흐릿하게 남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랬지.

 


정한은 늘 나를 아꼈다. 날카롭거나 거친 것은 쥐는 것조차 꺼려했다. 손이 비면 늘 나를 쓰다듬었고, 과도한 발열은 없는지 쓸린 상처라도 없는지 수시로 나를 살폈다. 나는 그의 피조물이었고 우리는 단 둘뿐이니 관심도 애정도 모두 당연한 거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이상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특별할 이유. 그가 나에게 애정을 쏟아부을 이유. 내가 그의 곁에 남아있어야 할 당위성. 

 

─그러니까, 윤정한이 홍지수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을 법한 핑계. 


나는 허리를 굽혀 라일락의 꽃대를 꺾었다. 정한이 좋아하는 보랏빛 꽃을 몇 줄기나 꺾어들고 이제 숲처럼 거대한 군락을 이룬 델피늄 그늘에 앉아 나는 라일락의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었다. 정한이가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올 거야, 안 나올 수도 있지만, 나오겠지…


 


 


정한이 개화 준비를 하는 델피니움 줄기 아래에서 나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내 발 아래가 연보랏빛으로 덮인 뒤였다. 짧은 잔디풀 사이에 엉켜 불규칙한 높낮이로 쌓인 꽃잎들을 밟고 그는 잠시 나를 내려보다가 손을 뻗었다. 들어가자, 감기 들겠어. 오래 전 내 방을 정리했던 날처럼 조금 붉은 눈가로 상냥하게 정한이 말했다. 나는 몇 송이 남지 않은 꽃대를 내려놓고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원을 걸었다. 이미 늦어버린 저녁은 진한 보랏빛으로 잠겨 있었고 사방은 여전히 벌레 울음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집에 돌아온 정한은 나를 아직도 완두콩 바구니가 얹혀 있는 탁자에 앉히고 불을 켰다. 마찰로 조금 쓸린 손끝을 자세히 살피던 정한이 경화제를 가지러 간 사이, 나는 램프 뒤편에서 콩을 한 알 발견했다. 하여간 덜렁대기는. 외톨이로 쓸쓸히 굴러다니는 동그란 콩 한 알을 다시 바구니에 넣으려다가, 나는 문득 내가 정한에게 그랬듯 콩을 내 입에 넣었다. 혀끝을 구르는 둥글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목 뒤로는 위장이 없이 조음기관과 공조기뿐이었기 때문에 실수로라도 삼켰다간 개복해서 조그만 완두콩의 으깨진 잔해까지 전부 씻어내야 할 테지만,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는 그를 따라하고 싶었다. 콩이란 건 무슨 맛일까. 씹을 땐 어떤 감촉이 느껴질까. 목 뒤로 넘길 때면 어떤 느낌일까. 정한은 앞으로도 아무 것도 삼키지 못할 나에게 그런 건 알려주지 않을 거였다. 나는 붓과 경화제를 든 정한이 돌아오기 전에 콩을 뱉어내 몰래 램프의 불꽃 안으로 던졌다. 여름이 다가오는 건지 강하지도 않은 불빛이 뜨거웠다.


 


  


 


 


 


지독히도 덥던 그 해 여름, 정한은 울타리를 수선하러 나가는 나를 굳이굳이 따라왔다가 혹서를 견디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열이 어느 정도 떨어진 뒤에도 흰 얼굴이 혈색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창백해져 가기만 했다. 원래도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집 밖으로 나오긴커녕 침대를 잘 벗어나지도 못했다. 눈을 뜨면 늘 나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횟수를 줄이고 되도록이면 집 안에 머무르려고 애썼다. 정한의 서재 가득한 책을 읽거나, 낡은 물건을 수선하거나, 이제는 미어터질 것 같은 창고를 정리하는 것 같은 일을 하면서. 그러다가 찾아낸 게 '사진기'였다. 검고 둔한 기계는 오래 전 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정한아, 이거 봐. 이거 사진기 맞지?"

"사진기… 그렇네. 청소하다가 찾은 거야? 아직 작동이 되려나."




웃으며 정한이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전원이 나간 것 같아. 새 건전지가 없으니 켜 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건전지를 몰랐다. 휴대용 작은 에너지 같은 거라고, 정한은 사진기에 들어 있던 건전지를 빼 보여주며 말했다. 내 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싶은 조그만 원기둥을 손바닥 안에서 몇 번 굴려 보다가 다시 그게 원래 들어 있던 자리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사진이라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는데. 내가 투덜대자 정한은 가만히 웃었다. 사진이라고 해도 책에 인쇄된 그림이랑 별로 다를 것 없어. 하지만 나는 인쇄기도 본 적이 없었다. 정한이 다정하게 풀죽은 내 뺨을 매만졌다.




"밖에 나갈까?"

"나갈 수 있겠어? 너 요즘 계속 누워 있기만 했잖아."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뭘…. 가자."




더위가 조금 수그러졌기 때문에 나는 정한의 말에 안심하고 신발을 찾았다. 얼마나 멀리 가고 싶어서 그래, 하고 정한이 기침하듯이 웃었다. 나는 따라 웃으며 그가 신발을 신는 것을 돕고 내 신발도 신었다. 혹시 모를 햇빛에 대비하기 위한 얇은 숄과, 혹시 모를 추위에 대비하기 위한 도톰한 담요도 챙겼다. 마침내 현관 밖으로 나섰을 때, 정한은 조금 비틀거렸다. 내가 급하게 허리를 받쳐 안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하고 내가 불퉁하게 내뱉자 한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가 말했다.




"너 처음 일어났을 때, 잘 못 걸어서 내가 부축해 준 게 기억나서."

"…뭐야, 그게 언젯적 일인데."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됐네."




찬바람이 들었는지 정한이 콜록이며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그가 잘 걷지 못한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이 슬펐다. 당장 오늘 내일 중이 아니더라도 그가 나를 곧 떠나게 될 것은 자명했다. 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게 다였다. 그래도 정한은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손끝으로 다정하게 내 목언저리를 만졌다. 












그게 정한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윤정한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슬픈 표정 하고 있지 마. 나는 대답 대신 정한의 손을 꽉 쥐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큰 눈은 끝을 보는 듯 흐린 그림자로 덮여 있었지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미소짓는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지수야. 정한이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면, 전의 그곳으로 나를 보내줘.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가장 먼 길에."

"살아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 지수야. 정말 미안해…."




몇 번이고 사과하는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의식이 점차 멀어지는지 정한은 계속 눈을 깜박이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옆에 누워 줘.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 옆에 눕자 정한은 나를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수명을 전부 깎아서라도 그에게 주고 싶었으나 기계 장치에게는 지나치게 무리한 소원임을 알았다. 정한의 미약하지만 고르고 편한 숨이 쇄골 근처 어드메에 느껴졌다. 태양이 찬란하고 온갖 꽃이 만개했던 나의 첫 겨울에 입술 위로 와닿던 따스한 숨결 대신 미지근한 온도와 뜨거운 숨이 번갈아가며 내 살갗 위를 스쳤다. 지수야… 비 온 뒤의 물안개처럼 뿌연 목소리로 정한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 여기 있어,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정한은 말을 이었다.




"보고 싶어, 조슈지…."

"……."




정한도 울지 않았다. 아주 작고 약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나의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결 묵직해진 가을 풀벌레 소리에 묻혀 버릴 것처럼, 정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작은 목소리로 정한은 홍지수를, 조슈지를 끊임없이 찾다 이내 움직이지 않았다. 푹신한 이불에 덮인 몸은 아주 천천히 식어갔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마지막 온기마저 전부 긁어모으기 위해 꼼짝도 하지 않고 밤이 새도록 마른 팔 사이에 안겨 있었다. 차라리 밤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했지만 야속한 가을 하늘은 푸르게도 밝았다. 














어떻게 그를 안고 나갔는지, 어떻게 묻었는지 같은 것을 애써 잊으려 나는 충전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서재에 틀어박혀 독서에만 몰두했다. 창틀에서 새들이 삑삑거려도, 다람쥐가 창문을 두들겨도 내다보지 않았다. 차라리 최소한의 지성만을 가진 단순한 기계였다면 좋았을 걸. 윤정한은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자 했지만, 남겨진 나는? 유일한 동반자도 삶의 목적마저도 잃은 채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나는?



우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정한의 방에 들어갔다. 먼지가 쌓인 책상 위를 강박적으로 청소하고 정리하고선 깨끗해진 책상에서 정한의 책이며 노트를 닥치는 대로 꺼내 읽었다. 종이 자체가 오래되었는지 대부분의 책들은 함부로 넘기면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노랗게 빛이 바래 있었다. 조심스럽게 넘기던 종잇장 사이에서 작고 빳빳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나는 노트를 깨끗한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무릎을 굽혀 책상 아래에서 내가 떨어뜨린 것을 찾았다. 허섭스레기 같은 농담 따위나 적혀 있는 종이라고 해도, 정한이 남긴 것들은 단 한 개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바닥에서 높이 떨어진 서랍장 아래에 비죽 튀어나온 모서리가 보였다. 찾았다. 나는 낡고 하얀 종이를 조심조심 꺼냈다. 아무 글씨도 무늬도 없는 흰 종이는 오로지 반대편에만 내용이 있었다.


사진이었다. 꼭 한 번쯤 보고 싶었으나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진'.




"정말로 인쇄된 종이랑 크게 다르지 않구나…."




나는 그 사진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커튼을 열었다. 주인이 떠난 뒤 처음으로 햇빛을 받는 방의 면면이 지나치게 눈이 부시도록 밝아 잠시 머뭇대다 다시 손에 든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진 속의 피사체는 단 둘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 빛바래고 어두워진 사진 속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이 새었다. 나란히 서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웃는 두 사람의 얼굴은 내가 매일같이 들여다보던 얼굴들이었다. 




"……정한아……."




사진 속엔 윤정한과 내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홍지수와, 밝은 색 머리카락을 적당히 흐트러뜨린 채 주머니에 양 손을 꽂고 있는 윤정한. 그리고 두 사람의 뒤, 군락을 이뤄 만개한 해바라기들. 사진 속의 내 얼굴이 내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제서야 단 한 번도 주의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사실들이 끼워맞춰졌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내 이름, 어원을 몰라 쭈뼛대야 했던 '조슈지'라는 애칭, 가끔 나를 넘어 무언가를 보는 것 같던 그 표정. 해바라기를 전부 뽑아내고 델피니움을 파종하던 정한의 등. 나는 사진을 다시 노트 위에 내려놓았다. 글자의 끄트머리마다 잉크가 번져 둥근 자국이 남은 거친 노트에는 투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Joshua Jisoo hong, 윤정한.

영원히 사랑해.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 한 문장을 위해 살았던 윤정한. 영원한 사랑을 위해 만들어진 나.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깨닫고 나는 서재까지 단숨에 뛰어들어갔다. 낡은 문이 벽에 부딪혀 덜컹이며 큰 소릴 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뽑아들었다. 인체 해부도, 전기공학, 인공 지능, 소조에 관한 미술사, 온도유지장치 등 정한이 나를 만들 때 한 번쯤은 읽었을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그가 나를 만들 수 있었다면, 나 또한 그럴 수 있을 거였다. 아니, 그렇게 하고 말 거였다. 반드시.














정원에서 만수국이 양 손에 꼽지도 못할 횟수만큼 피고 졌다. 틈틈이 꽃을 가꿔야 했기에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갓 나온 나에게 정한이 그랬듯이, 나도 정한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언제인지도 모를 막 시작된 봄날에 드디어 비닐 시트가 깔린 침대 위의 정한이 눈을 떴다. 내가 기억하는 정한의 모습 그대로 눈을 느릿느릿 감았다 뜨며 천장을 빙 둘러보던 시선이 마침내 나에게로 닿았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성공했을까? 이번엔, 드디어 내 이름을 부르며 웃어줄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어… 음… 네."

"내 이름은 홍지수야. 홍, 지, 수. 조슈지라고 불러도 돼."

"…조슈지."

"잘했어. 네 이름은 뭔지 알겠어?"

"윤정한. 정한, 그리고… 윤."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정한을 부둥켜안았다. 마침내 성공이었다. 드디어 나는 '삶'을 되찾게 된 거였다. 내 사랑을, 내가 태어난 이유, 나를 살게 한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