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캐치 (격월 영원 19년 8월호)
빌런 호시의 정확한 특기는 그가 S급이 된 지금에서도 불명이었다. 그는 뭐든 해 버렸고, 어떻게든 우리에게 엿을 먹였다. 그가 A급이었던 일 년 전까지 호시의 최대 업적은 본부의 부지 중앙에 있는 공원을 반파시키고 감시카메라에 윙크를 해 보인 뒤 유유히 사라진 일이었다. 그게 갱신된 일 년 전엔,
"전원우 씨, 설문에 집중하세요."
"매일 같은 것만 쓰고 있는데 얼마나 더 집중을 하라고요?"
"집중하세요."
호시는 대담하게도 요원 숙소에 침입해 나를 납치해 사라졌다. 들어온 경로도 나간 경로도 불명이었다. 하필이면 나였던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키가 작은 그가 그나마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게 마르고 가벼운 나였다는 설이 가장 큰 힘을 얻어 3개월 정도 일반식 대신 증량식이 나왔으나, 입에 맞지 않는 탓에 거의 먹지 못했고 되려 몸무게가 줄어든 탓에 식사 대신 운동을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운동을 자주 하진 못했다. 귀환한 이후로 나는 계속 임무와 훈련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이딴 설문에 낭비하고 있었으니까.
빌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내가 이딴 설문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 개자식들이라고 생각하지. 빌런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야 빌런은 우리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니까. 호시를 막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 젠장, 체력 향상을 위해 운동 갈 테니까 이 개같은 설문 좀 집어치워 줬으면. 정답이 정해진 설문조사에 성실하게 응하기란 힘들었다. 허나 성실하지 않으면 언제든 퇴출될 게 내 위치였다. 납치당해 마인드컨트롤을 당하고서도 사지 멀쩡히 귀환해 의심을 받는 나.
'권순영'이란 이름은 누구 거였을까? 내게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 건물의 보안을 뚫고 쥐도 새도 모르게 요원을 납치해 사라짐으로 몸값을 올린 S급 빌런에게서, 나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 날 이후로 계속.
일 년이나 꼬박 세뇌에 가까운 재교육을 견뎌내며 머릿속에서 '호시'는 점점 흐릿해져 갔다. 소식 한 점조차 들어오지 않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지친 몸을 침대에 뉘일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팔은 대체 왜일까. 고립될수록 내 생각은 한 방향으로만 쏠렸다. 그 날, 호시의 진실은 뭐였을까. 이미 계절이 네 번 흘러가며 빌런 호시를 거의 잊었음에도 그 날의 호시, 권순영에 대한 것만은 막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듯이 생생했다. 그는 나를 기만한 것일 텐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휴가를 신청했다.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환한 후 외출 한 번 하지 않았기에 일 년만의 휴일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S급인 호시가 아니라 C급 잡범이 나타난대도 맞대응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휴가에 맞춰 호텔방 하나를 빌렸다. 닷새 내내 틀어박혀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본부는 동일한 조건, 그러니까 내가 본부를 빠져나가 호텔로 직행하고 휴가 종료일에 본부 요원이 마중나올 순간까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내 휴가를 승인해 주었다. 건물이 아니라 방 밖조차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작은 물병 두 개로 버텼더니 둘째 날 아침엔 배가 고파서 잠에서 깼다. 배가 고프기도 하는구나. 몇 군데쯤 고장나 버린 줄만 알았던 몸엔 희소식이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캔버스화를 구겨신고 카드키를 뽑아들었다. 전날 목욕을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구질구질한 꼴로 나다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잠이 깰 정도로 배가 고팠던 것치곤 단출한 식사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내려 자리로 돌아왔다. 식사한 흔적이 조금 남은 접시를 앞쪽으로 밀어 놓고 느긋하게 통유리 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던 두 번의 밤이 내가 잃어버렸던 톱니바퀴 몇 개를 제자리에 끼워둔 것인지 몸도 가볍고 기분도 산뜻했다. 서버가 다가와 내 식탁 위의 접시를 치울 때까지, 정확히는 접시가 치워진 자리에 남은 종이를 발견하기 직전까지는.
종이 위의 내용은 간략했다. [보고 싶었어]. 다섯 글자. 하지만 그 짧은 쪽지만으로도 나는 누가 이것을 내게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몇 걸음 걷지 못한 서버가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방에 돌아와서야 대처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일부러 농락당하려는 것도 아니고, 서버를 붙잡고 따지거나 책임자를 불러 cctv를 확인하거나 하다못해 본부에라도 알렸어야 했지만 급작스럽게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방문 앞에서 침대까지의 짧은 거리를 걸을 뿐인데도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겨우겨우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침대 위에 쓰러진 후에야 든 생각은, 아마도 자고 일어나면 나는 이 호텔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그 호텔 방 안이었다. 침대 아래의 구겨진 캔버스화도,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둔 캐리어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샤워가운으로 바뀐 옷차림과 옆자리에 누워 잠든 사람이었다. 햄스터처럼 둥글던 뺨이 날카롭게 갸름해진 '호시'. 까만 머리가 흰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권순영'. 내 어깨를 그러안은 팔뚝. 대체 왜 호시는 이 방에서, 내 옆에서, 심지어 잠들어 있지? 멍한 머리로 겨우겨우 낸 결론은, 이게 호시가 만든 꿈이라는 거였다. 그렇지. 꿈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다. 침대 어디쯤에 도청기가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방에 굳이 들어와 잠드는 멍청한 빌런이 있을 리가.
기왕 꿈이라고 생각한 김에 나는 좀더 제멋대로 굴어 보고 싶어졌다. 내 쪽을 보고 옆으로 누워 잠든 권순영을 슬쩍 밀어 반듯하게 눕히고 그의 몸 위로 엎드리듯이 올라탔다. 가슴팍과 배가 눌린 권순영은 뒤척이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몸에 힘을 주어 버텼다. 한참을 끙끙대다 눈을 뜬 권순영에게 산뜻하게 인사도 건넸다. 잘 잤어, 자기야? 권순영은 바보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더듬더듬 그렇다고 대답했다. 입술을 가볍게 붙이자 하얗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보 같은 정도가 아니라 바보다, 이 정도면. 키스는 다음이라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속삭이자 조그맣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검은자가 커서 정말 햄스터 같다. 어깨를 떠밀려 위치가 바뀌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나를 침대 위로 깔아눕힌 권순영이 잡아먹을 듯 내 입술을 삼키고 혀를 빨았다. 잠깐은 버틸 만 했지만 나는 끝내 권순영의 종아리를 있는 힘껏 밟았다. 공격당했다고 느끼자 권순영은 눈 깜박할 새도 없이 내 양 손을 모두 틀어쥐고 목을 짓눌렀다. 아, 이거 생각보다 꽤 짜증나는 상황이었구나.
"원우야."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이 눌려 있어 숨만 쉬기도 벅찼다. 아직도 숨을 몰아쉬는 주제에 그는 꽤나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관찰하듯 내려다보았다. 내가 적의를 품은 게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시선은 눈에서 점점 아래를 향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빨개지는 얼굴. 그래, 꿈이겠지. S급 빌런이 이렇게 순진할 리가 있나. 숨통을 조이던 손에 조금 힘이 빠졌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키스를 힘으로 하냐, 너는."
"아, 아팠어? 미안."
"내 옷은?"
"더러워져서 갈아입혔어."
"핑계가 조잡하네."
피식 웃자 권순영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걸 뱉었다. 꿈 치곤 너무 디테일하지 않나, 이거…. 볼을 꼬집자 말랑말랑한 살이 죽 늘어났다. 좀 세게 당기자 권순영은 도로 작아진 눈을 찌부러뜨리며 끙끙거렸다. 꿍 아이이까 고아헤. 입가 한쪽이 내 손에 붙들려 있어서 바보 같은 빌런은 다 새는 발음으로 말해야 했다. 이런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간 목이 날아가게 될 곳에 돌아가면, 너를 잊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 무슨 수고를 얼마나 해야 할까. 무거워진 생각 때문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온순해진 권순영이 놓여난 뺨을 빈 손등 위로 부볐다. 다리 한 번 밟았다고 목을 조른 주제에. 원우야. 권순영이 재차 나를 불렀다. 이번엔 수트가 아닌 딱 붙는 폴라티에 검은 바지. 꿈이 아니긴 했구나.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저기, 하고 입을 열었다.
"권순영이 누구야?"
"뭐? 아니, 원우야, 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로 보이는데…."
"호시."
"……내 이름이 권순영이야. 호시는… 그게 멋있으니까. 그보다 너 이번엔 세뇌가 아예 안 들었구나?"
"그럼 이번엔 날 죽일 거야?"
권순영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잠시간 나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키스는 듣고, 좋아한단 말은 안 들었어? 대체 왜,"
"나 입 싼데."
"……."
"돌아가서 너랑 섹스했단 얘길 하고도 살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안, 아니, 안 했거든?! 진짜 뭐야 기껏 보내줬더니…!"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권순영이 내게서 파드득 떨어졌다. 가슴 위로 팔을 교차해 엑스 자를 만든 꼴이 어지간히도 억울했나 싶으면서도 나까지 좀 억울해졌다. 살아 돌아간 덕분에 하루하루가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던 내 상황도 모르고. 있잖아. 다시 말을 건네자 권순영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귀엽게.
"왜 이번엔 납치하지 않았어?"
"…듣고 나면 후회할 텐데."
"말해."
권순영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눈알을 굴리는 폼이, 거짓말이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한 건 그의 생각이지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그냥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한 끝에 권순영이 내놓은 대답은 뜻밖이었다.
"…들자마자 토하더라, 너. 과식했어?"
"……."
"미안. 거짓말하면 화낼까봐…."
옷은 어쨌냐는 내 말에 '더러워져서 갈아입혔다'고 대답했던 것도 생각나 창피함을 감당할 수가 없어졌다. 마른세수를 몇 번 하자 권순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서 좀 짜증났지만 그렇다고 말하긴 너무 유치한 것 같아 입을 다물자 이번엔 다시 옆에 바싹 붙어 눕는다.
"원우야. 내가 보내 주면 죽으러 갈 거야?"
"어."
"돌려보내준 게 그렇게 괴로웠어?"
"…그걸 말이라고."
다시, 권순영의 팔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보내지 말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권순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옅은 숨결이 귓바퀴 위를 간지럽혔다. 한 마디만 해. 권순영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아주 낮고, 아주 축축했다. 방금 전까지 불쌍한 햄스터 같은 얼굴로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던 바보 같은 빌런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좋아, 라고 딱 한 마디만 하면, 이제 어디에도 안 보낼게."
"……."
"지긋지긋한 인간들,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는 사람들 대신 널 너무 좋아하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그 말만 하면."
"좋아. 같이 가."
"너희 대머리가 알면 펄펄 뛰겠는데."
키득이며 권순영이 자연스럽게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위치가 바뀌는데도 얼굴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아니, 점차 가까워진다. 이제는 입술 위로 권순영의 숨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만은 권순영이 후벼파듯 거칠게 내 입 안을 헤집는대도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