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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한에게는 그 날, 지수와의 전화가 썩 편치 못했다. 물론 지수를 사랑하지만, 지수의 전화가 정말 반갑지만… 계속해서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정한은 지수에게 나 얼마나 사랑해- 하고 묻고 싶었지만, 만약 잘생긴 남자친구 덕분에 잠깐 화를 잊었을 뿐인 지수가 그 말에 펄쩍 뛰며 ‘전화 안 받는 정한이는 안 사랑해!’ 라고 대답해 버리기라도 했다면?! 윤정한은 살아 온 세월에 맹세코 눈물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지수의 심술궂은 밀당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반달처럼 둥근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수야 보고 싶어….”
푼수 같기로는 갓 사귄 신입생 CC 못잖은 소릴 하며 정한은 방금 전화를 끊고 화면을 끈 휴대폰을 다시 켜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수야 너 오늘 인앤아웃 먹고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안 돼? 금세 메시지를 확인한 지수는 어이가 없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너 이제 내 밥그릇에도 참견해? 라고, 아주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답장을 보내 왔다. 정한은 그걸 읽고 한국어에 많이 능숙해진 지수에게 감동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존나 귀여워 어떡해. 말은 이래 놓고 오늘 햄버거 먹을 거 다 안다. 왜냐면 안 먹겠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그래도 정한은 괜히 애교 섞인 문장을 찍어 보냈다.
[응 나도 사랑해 ^^]
액정 너머의 지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있을까? 어쩌면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한은 지수의 제스처를 확답할 수 없는 것처럼 지수의 대답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같은 이모지나 보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그조차 못 되고 🤔같은 어정쩡한 표정일 수도 있지. 그래도 가끔은 사랑한다고 대답해 줬으니까, 그게 바로 지금일지도! 아, 하지만 그런 건 엄청 기분 좋을 때나 해 주는 반응인데. 이러다가 햄버거 먹을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하면 어떡하지. 난 웃는 이모티콘도 좋은데. 아이 지수야 점 하나만이라도 빨리 찍어 줘…
겨우 비트윈 답장 가지고 신나게 롤러코스터를 타며 정한은 침대 위를 뒹굴었다. 메시지를 보내면 몇 초 안에 재깍재깍 답장이 오던 시절은 지났건만, 속 편하고 느긋해야 할 3년차 연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정한은 잘 펴두었던 이불도 걷어차고 뽀득뽀득 씻은 얼굴을 베개에 마구 문질러대며 듣는 사람도 없이 징징거렸다. 한참이나 애를 태우던 지수는 정한이 오래오래 투정을 부리다 못해 침대 위에 축 늘어질 쯤이나 되어서야 잘 구워진 삼겹살 사진을 보내 왔다. 깔끔하게 초점이 잡히고 먹음직스럽게 보정까지 한 사진 아래에 메시지가 떴다.
[햄버거 내일 점심에 먹을래]
우리 지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정한은 헤실헤실 풀린 입가를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그러나 웃어 줄 줄 알았던 지수는 입가를 축 늘어뜨린 시무룩한 표정의 이모티콘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한은 당황했다. 왜?! 지수의 다음 메시지가 입력되는 아주 잠깐 동안, 정한의 머릿속은 이미 자신이 했을지도 모르는 수백 개의 잘못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보처럼 제 잘못을 생각하다 네 구남친이랑 만나서 미안해- 라는, 오해의 여지가 가득한데다 본뜻 그대로도 몇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할 메시지를 보낼 뻔했던 정한을 막은 것은 지수의 짧은 감탄사였다.
[아]
[잘못 보냈어]
그리고 지수는 식탁 위의 음식들을 모조리 입에 쓸어넣는 돼지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보내 왔다. 하아아아…. 정한은 안도의 한숨을 기일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주 환장할 남자친구다. 너도 너 귀여운 거 알지? 정한이 묻자 지수는, 이번엔 커다란 당근을 야구배트처럼 휘두르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냈다. 당근엔 굵은 글씨로 ‘당근빳다죠’ 가 적힌… 지수야 너는 정말 귀엽고 정말 토끼 같지만 내가 널 잘못 가르쳤어…….
그런 것치곤 입가를 죽 늘려 헤실헤실 웃으며 울 지수는 어떻게 한국어도 이렇게 잘 하지 같은 아첨 가득 메시지를 보내고 정한은 무의식중에 이제 습관이 된 질문을 했다. 지수야 나 사랑하지? 하지만 고기 앞에서 바쁜 지수는 이모티콘을 끝으로 답이 없었다. 정한은, 휴대폰 액정이 가라앉을 때마다 손끝으로 톡톡 두들겨 깨우며 오래오래 지수를 기다렸다.
보고 싶어, 내 남자친구. 우리 지수.
연락을 받는 둥 마는 둥 며칠을 보내더니 이제는 1분마다 답장을 재촉하던 정한은 너 계속 이 따위로 굴면 한국 안 가고 휴학해 버리겠다- 는 지수의 협박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해선 침대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로 한참 있다가, 지수와의 대화창에 눈물 이모지와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려다가, 지수가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관뒀다. 지수는 원래 이런 거 싫어했으니까. 귀찮게 들러붙는 거, 애정표현을 요구하는 거, 정한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에 놓길 바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정한이 애교를 부릴 때도 그다지 좋은 기색이 없었다. 역시 내 얼굴만 좋아하는 거지 조슈지! 정한은 분한 마음에 괜한 쿠션만 팡팡 내리쳤다. 자타공인 홍지수 잘알, 2년 넘게 잘도 사귀어 온 남자친구의 시뮬레이션으론 지수가 정색하며 ‘당연한 거 아냐? 정한이 니가 얼굴이랑 섹스 말고 잘하는 게 뭐가 있어?’ 하고 대답하는 모습밖에 그릴 수가 없어서 더 서러웠다. 물론 연락 독촉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의 언젠가, 쪼끔 먼 과거에 앳된 지수가 앳된 승철과 함께 있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정한은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의심 비슷한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가슴이 답답했다. 해결해 줄 건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친구의 곧고 단단한 포옹뿐이건만 하필이면 지수는 지금 태평양 건너편에 있다. 정한은 울적해져서 침대 위에 모로 쓰러졌다. 애먼 쿠션만 두들겨 팬 덕에 들뜬 먼지들이 호흡기로 들이닥쳐 기침이 나는 것조차도 남 탓을 하고 싶어졌다. 이게 다 지수가 없어서야. 정한이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밝혔다. 지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화내서 미안해]
[근데 짜증나 진짜로]
이상한 당근빳다 나부랭이 말고 완곡하고 예의바른 말 좀 가르쳐줄 걸. 정한은 더 서러워져서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3년 전의 자신을 때릴 수 있다면 한 일고여덟 번쯤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 한다고 슬랭이나 가르쳐서는. 입을 삐죽 내민 채 정한은 답을 써 보냈다.
[힝입니다]
보고 싶은 지수는 언제쯤 돌아올까. 아직 항공권을 보여주지 않는 걸 보니 며칠은 넉넉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독촉한다고 해서 지수가 정말로 휴학을 하지는 않겠지만 피차 보고 싶기는 마찬가지일 사이에 괜히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정한은 참았다. 그저 그리웠다. 가슴팍 위로 턱 얹어지던 지수의 까만 머리카락이, 웃을 때면 유달리 도톰하게 부풀어 마카롱 같던 눈두덩이, 사슴처럼 길고 가는 목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도 남는 큼직한 손이, 손톱 끝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다.
[보고 싶어 지수야]
정한은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휴대폰 액정을 껐다. 지수야 빨리 와. 할 수만 있다면 태평양 건너까지 들리도록 소리치고 싶은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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