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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게 홍지수라는 사실은 아마 학관 고양이도 알 거다. 사랑 좋지. 좋은데 문제는 정한의 사랑이 좀 유난스러운 점이었다. 지수가 음운학 수업 들으러 갈 때 정한이는 공강이고 정한이가 알고리즘 강의 들을 때 지수는 교양 영어회화(당연히 날로 먹으려고 신청했다) 대강의실 맨 뒷줄에서 정한이 토익 문제집 채점하던 그 학기, 지수랑 교필 과제 같이 하던 신입생 전원우는 도서관 세미나실까지 따라와 음침하게 ppt 만들고 있는 정한이 보고 질색하면서 자기 번호를 줬다. 내가 책임지고 나 말고 아무도 말 못 걸게 할 테니까 님은 좀 꺼지시라고. 원우는 그 책임감 덕분에 입학한 직후부터 네 학기 연속으로 지수랑 앉을 뻔했지만 지수가 정한이랑 영어회화 수업 같이 들어 준대서 지난 학기 수강정정은 정한이만 했다.
원우를 들들 볶은 보람이 있는지 없는지, 지수는 정한이가 조금만 한눈팔면 새 친구를 만들어 왔지만 낚아 오는 친구마다 '아 그 지랄같은 사랑꾼이 너구나…' 같은 표정으로 정한이와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했다. 여기까지만 하면 정한의 피해망상 같겠지만 실제로 지수가 친구랑 커피 마시는 거 먼발치에서 구경하다가 근처에 있지도 않은 원우한테 메시지도 받았다. 선배 지수 형 스토킹 좀 그만해요 공무원은 민원처리하면 월급이라도 받지 난 뭐야?
회상을 멈춘 정한이 눈앞의 레몬에이드를 쪼로록 마셨다. 끝내 빨랫감 한 무더기를 안고 지수에게 쫓겨난 참이다. 학교 앞 카페는 방학 중 대학가의 상점들이 으레 그렇듯이 한산했다. 지수가 뽀송하게 빨아서 말려 놓은 베이지색 후드 티셔츠의 모자 끈을 묶었다 당겼다 풀었다 손장난이나 치던 정한이 시계를 또 쳐다봤다. 카페 옆 코인세탁소에서 세제 푼 물과 함께 대형 세탁기 안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겨울 이불을 기다렸다가 보송보송 건조까지 다 해야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도통 시간이 안 가는 탓이다. 엄한 초침만 노려보다가 테이블 위로 쭈우욱 엎드린 정한이 아직 꽤 많이 남은 방학 동안 지수랑 뭘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학기중이라 바쁜 것도 아닌데 홈 데이트만 하는 파렴치한이 되긴 싫어서다.
자전거. 홍지수는 취미로 자전거 타는 사람 중 제일 강철 체력이다. 이건 탈락.
강변 산책. 지수가 지루해함. 이것도 탈락.
고궁 관람. 나쁘지 않은데 날씨가 애매하다. 눈 오면 풍경이라도 보지.
놀이공원. …이거 좀 괜찮네.
휴대폰 메모장에 '놀이공원 데이트하기' 라고 적은 정한이 화면을 스와이프해 인터넷 창을 열었다. 괜히 큰 데 갔다가 지수 춥다고 짜증내면 안 되니까 적당히 적당한 곳을. 그런데 지수도 무서운 거 잘 타니까 한번 즐겨봐도 되지 않을까…? 롱패딩에 목도리 장갑 꽁꽁 싸매고 막 바지 두 개씩 입히고 등산 양말 신겨 가지고 온 몸에 핫팩 붙여서. 바지 두 개부터 지수한테 팔뚝 맞을 상상을 하며 실실 웃던 정한이 곧장 지수한테 메시지를 보낸다. 지수야 우리 놀이공원 갈래? 지수도 청소하느라 바쁠 테니 재촉하는 대신 인터넷 창으로 돌아가 전국 테마파크 중 제일 무서운 곳을 검색하던 정한에게 이내 전화가 걸려왔다. 지수가 볼이랑 콧등에 생크림 묻히고 웃는 사진이 화면 가득 뜬다. 와 누구 남친이 이렇게 귀여워. 싱글벙글 웃으며 정한이 초록색 통화 버튼을 당겼다.
"지수야, 벌써 나 보고 싶어?"
'헐, 왜. 집에 안 오고 싶어서?'
"아니 나야 완전 가고 싶지이…."
괜히 장난 걸었다가 뼈도 못 추린다. 지수가 장난이랍시고 현관 비밀번호 바꿔 버리면 서운하고 억울할 것도 정한이라 금방 수그렸더니, 전화 너머 지수가 까르르 웃었다. 빨래방 와이파이 돼? 오물오물 묻길래 카페 왔다고, 갈 때 레몬티 사 간다고 했더니 목소리가 괜히 삐죽댄다. 레몬티 안 먹을 거거든. 정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 요즘 좀 얌전했지 홍지수.
"레몬티 아니면 뭐 먹게? 조슈지 이 계절에 아아 마실 거야?"
'……. 자몽티 먹을 건데?'
"그래 그럼. 자몽티 사 갈게."
정한이 무던하게 받아넘기자 지수는 또 잠깐 말이 없다. 홍지수는 미운 짓 해 놓고 현타가 너무 빨리 와서 진짜 귀엽다니까. 테라스 바로 옆, 통유리를 마주보는 스툴에 앉아 있지만 지나는 사람도 없어서 누가 놀릴 걱정도 없이 마음껏 입가를 흐물거리며 정한은 생각한다.
"아 빨리 세탁기 다 돌아가서 저 이불이랑 같이 지수 옆으로 순간이동 하고 싶다."
'뭐어? 하하하, 건조기까지 다 돌려서 걸어 와 정한아.'
"지수야 너 내가 밖이라서 참는 거야…."
정한이랑 2년도 넘게 연애 한 지수가 행간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집이었으면 벌써 너 자빠뜨려서 홀랑 잡아먹었어. 표정관리 못 하는 건 그렇다 치고 차마 그 말까지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걸 알아 지금 지수는 집에서보다 조금 더 유치하고 제멋대로다. 한참 시원하게 웃은 지수가 아 참, 하고서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놀이공원은 갑자기 왜? 갑자기 양심 같은 게 막 콕콕 찔려?'
"응 완전 찔리니까 우리 놀러 가자. 가서 츄러스랑 구슬 아이스크림 먹고 폴라로이드 찍고, 또, 음… 아예 멀리 가서 자고 올까? 지수야 우리 그냥 제주도 갈래?"
'너는 무슨 애가 그렇게 일관성이 없어.'
지수가 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서 정한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 술 더 떴다. 방학에도 나와서 일하는 불쌍한 알바생이 듣거나 말거나 이제 알 바 아니다.
"그럼 아예 어디 외딴 섬 같은 곳은 어때? 배도 매일 안 다니고 사흘에 한 번 오고 그러는 데. 휴대폰 다 꺼놓고 커튼 치고. 어?"
'미쳤나봐, 윤정한.'
"미친 지 한 삼 년 정도 됐나. 어떤 아기사슴이 내 마음을 훔치는 바람에…."
'아, 아!! 너 진짜 비밀번호 바꿔 버려. 창피하게 밖에서 왜 그러는 거야?'
당황했는지 지수 문법이 엉망이다. 지는 맨날 나 토끼 취급 하면서. 삐죽이는 대신 정한은 그냥 웃었다. 왜 지수야, 집에서 둘만 있을 때 하면 좋아할 거야? 지수가 전화 너머로 소리 없이 한참 푸드덕거리다가 또 잠깐 조용해졌다. 민망한지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한다는 말이,
'어 좀 그럴 것도… 같은데…. 근데 전화로 들으니까 너무 민망해, 정한아.'
앞의 말밖에 안 들은 정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구역 미친 사랑꾼으로 유명한 미남을 구경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놀라 손바닥으로 괴고 있던 턱을 삐끗했다. 보이지도 않는 카운터 안쪽 상황 역시 알 바가 아닌 정한이 테이블 위에 대충 늘어 놓았던 지갑이며 냅킨을 허겁지겁 정리하다 지수의 말에 손을 멈췄다. 이불 안 빨아 오면 너 우리 집 출입 금지야. 말랑말랑한 지수의 단호한 말에 정한은 또 금세 풀이 죽었다. 지수야 나 사랑하는 거 맞지…. 불쌍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이 겨울 내내 시달린 지수가 쓰읍, 하고 다그치는 소릴 냈다.
'윤정한 너 허리 펴고 똑바로 앉아. 안 그럼 우리 엄마한테 맨날맨날 아프게 침 놔 달라고 할 거야.'
"지수야 난 얼굴도 뵌 적 없는 장모님이 이 순간만큼 무서운 적이 없어…."
'어허, 얼른 예쁘게 앉아. 허리 어제만 쓰고 안 쓸 거야?'
"아닙니다. 당장 바르게 앉겠습니다."
능청스럽게 정한이 군기 잡힌 목소리를 연기하자 지수가 까르르 웃는다. 우리 정한이 오늘 착하네. 칭찬 한 마디를 덤처럼 덧붙여 주면서. 태도가 이렇든 저렇든 지수는 다정하다. 근본부터가 따끈따끈하고 부드럽고 포근하지. 지수를 만나기 전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 침대와 침구였던 윤정한이 홀랑 빠진 것도 당연지사다. 정한이가 거지 같은 라면을 끓여도 고맙다고 하고, 물 빠진 빨간 머리카락도 직접 말려 주고, 매일 이렇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착하다 잘한다 해 주니까. 그런 지수를 안 좋아하고 배기냐고.
홍지수 꼬리가 몇 갠지도 모르고 정한이 헤실헤실 웃었다. 시곗바늘아 달려라. 빨리 집에 가서 우리 말랑쫀득딸기찹쌀떡아기사슴 월드넘버원아메리칸스윗하트한테 뽀뽀 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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