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세상은 환했고 큼직한 유리창 밖은 눈이 부시게 빛이 났다. 내 옆에 서 있던 이가 그게 '낮'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밝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른 오후의 햇볕을 받으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는 분명 이 사람을 알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윤정한. 성은 윤이고, 이름은 정한이야. 정한이라고 불러.""정한이?""…응, 그렇게 부르면 돼.""정한, 이, 야.""정한아, 라고 해야지. 네 이름은 알겠어?""홍지수." 맞아, 지수야. 나의 사랑스러운 지수. 정한이 중얼거리며 나를 껴안았다. 촉각이 예민하지 않아 느껴지는 건 온도 정도였지만 포옹은 퍽 부드럽게 느껴졌다. 뒷머리를 토닥이고 뒷목을 가볍게 쓸고 지나간 정한의 손이 뺨에 닿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팔을 벌려 정한의..
대체로 눈이나 서리, 하다못해 진눈깨비조차도 아주 늦은 가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하릴없이 부쩍 차가워진 계곡물 위로 작은 눈송이 하나를 떨어뜨려 녹이기를 반복하는 승철의 무릎 위로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이 살금살금 올라앉았다. 관심을 끌려는 듯 빙글빙글 몇 번 돌며 존재감을 알린 빛이 이내 형태를 갖추어 승철의 품에 폭 안겼다. 곱슬거리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승철의 뺨에 부비며 한솔이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늘어지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나 보고싶었지이-""어. 완전.""그런데 왜 이렇게 반응이 싱거워?""…한솔아, 우리 몇 시에 만나기로 했었지?""정오에….""지금이 정오야?"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한솔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정령에게 인간의 시간이 별 의미가 없다 해도 여름에 제가 ..
흰 백지를 마주하고 앉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원우 작가님, 이번에도 펑크 내시면 계약금 물어 주셔야 해요.] 메시지는 간결했다. 아니 간결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길면, 내가 행간 또는 요점을 읽지 못했다고 변명할 거리를 만들어줄 뿐이니. 계약금을 돌려 주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다. 나는 꽤 잘 나가는 작가고, 신작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인세를 매달 받는다. 하지만 계약 파기라니. 그것도 가장 메이저한 플랫폼에서 파기당한다면 재능있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이 바닥에서 나는 순식간에 잊혀질 테다. 사실 이 정도 플랫폼에서 내가 친 대형사고를 한 번이라도 눈감아 준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어지간한 사고도 아니었다. 데드라인은 15일 오전 8시였고, 지금은 18일 오후 두 시..
▶ 정한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중 하나는, 감정이 자신을 잡아먹도록 두지 않는 거였다. 의식하고 하는 행동 중에선 가장 비중이 큰 일이지만, 사실 연습생 때까지의 정한은 미숙한 감정 컨트롤 때문에 별명이 '걱숨'일 정도였다. 걱'정한'숨. 걱숨이. 지금의 정한은 멤버들과 팬들이 모두 인정하는 장난꾸러기 재치꾼이지만, 그건 걱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차라리 연습생 때가 마음만은 더 편했을 정도니까. 그러고 보니 그 때 지수는 어땠더라? 정한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작은 머릿속을 아무리 박박 긁어내도 정한이 기억하는 지수는 반짝이는 눈으로 정한의 별 것 아닌 말을 집중해 들어주거나 실없이 헤헤 웃거나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연습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 홍지수 혼자 있으면 뭐 했었지. 정한은 그 별 것..
0. 윤정한이 웃으면 홍지수는 어쩐지 조금 슬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서 정한은 지수에게 함부로 웃어보일 수가 없었다. ◀◀ 지수는 대체로 나긋하고 양보를 잘 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말대답 한 번 없이 고분고분 져 주기만 하는 순둥이는 아니었다. 별 의미도 없이 아무 대꾸나 하며 약올리길 좋아하는 정한과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정한의 동생은 말했다. 말만 잘 하는 오빠에게 밀려 편의점까지 심부름을 다녀온 여동생의 말에 그제서야 정한은 그런가, 싶었다. 하긴 지수였다면 순순히 편의점 심부름을 가 주진 않을 거였다. 되려 정한을 질질 끌고 나가면 나갔지. 혼자 다녀온 편의점이 여간 억울한 게 아닌지 정한과 꼭 닮은 입술을 삐쭉 내미는 동생에게 젤리 봉지를 내밀며 정한은 그냥 웃었다. 아마 지수..
낯선 천장이다. 기숙사의 내 방 천장은 흐릿한 회색이다. 지나치게 밝지도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은, 먼지 같은 색. 그러나 눈앞의 천장은 밝고 화사한 크림색이다. 엷은 아이보리 색 리넨 커튼 사이로 환한 햇볕이 비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기숙사는 요원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햇빛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블라인드를 달았고, 내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지? 병원?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혈압 탓에 머리가 띵하다. "일어났어, 자기야?" 목소리는 낯설지 않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팍에 늘 차고 다니는 단도를 빼려 했으나 잠옷 안은 맨살뿐이었다. 황망함에 굳은 사이 '호시'가 내 상체를 가볍게 당겨 안고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천천히 좀 일어나라니까. 나..
도토리 줍는 꼬꼬마 솔이를 생각하자.. 데굴데굴 도토리 한움큼 주워서 바지주머니에 넣고 후드티 캥거루주머니에 넣고 모자에 넣고 손에 쥐고 집에 와서 밍규한테 너 먹지도 못하는 걸 왜 주워왔냐 손이랑 옷은 이게 다 뭐냐고 혼나서 풀죽은 솔이.. 옷의 모든 주머니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도토리.. 여기에다 투덜거리면서 솔이 손이랑 얼굴 씻겨 주고 도토리도 가지고 놀 수 있게 잘 씻어서 소쿠리에 담아 주는 밍규 추가하면 완벽하겠죠.. 도토리로 구슬치기 하는 솔람쥐와 툴툴거리면서 솔이 옷 빨아서 널어주는 밍.... 정말 한 권의 동화책 아닌지 (몽쉘님) 존나 귀여워서 진짜 방금 베개때렸어요 ㅠㅠㅠㅠ 도토리 씻어주는 밍규도 넘 귀엽구 구슬치기하는 솔람쥐도 넘 사랑스럽구 (솔람쥐 애칭 득템해갑니다) 나중에 빨래 끝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