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니까 내 말은 너를 다 알고 싶어. 그런 노래 가사가 있긴 했는데. "윤정한 뭐 하다 이제 와!" "지수야 너는 니 심부름으로 이불 빨래 하러 간 사람한테 왜 그렇게 말을 해…." "얼른 와서 인사해. 얘가 최승철이야!" "윤정한? 지수 너, 얘랑 알아?" "넌 윤정한도 모르니?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정말." "…윤정한 너 연예인이냐?" "연예인이겠냐?" 겨울 이불로 빵빵해진, 지수도 쏙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타포린 백을 한쪽 어깨에 힘겹게 짊어진 정한이가 승철이에게 톡 쏘아붙였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이 멍청한 대화의 시작을 지수가 끊었다는 사실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온 적도 없으니 양심에 찔리지도 않는다. 오피스텔 1층 편의점 테라스의 꼬질꼬질한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아직 따뜻..
윤정한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게 홍지수라는 사실은 아마 학관 고양이도 알 거다. 사랑 좋지. 좋은데 문제는 정한의 사랑이 좀 유난스러운 점이었다. 지수가 음운학 수업 들으러 갈 때 정한이는 공강이고 정한이가 알고리즘 강의 들을 때 지수는 교양 영어회화(당연히 날로 먹으려고 신청했다) 대강의실 맨 뒷줄에서 정한이 토익 문제집 채점하던 그 학기, 지수랑 교필 과제 같이 하던 신입생 전원우는 도서관 세미나실까지 따라와 음침하게 ppt 만들고 있는 정한이 보고 질색하면서 자기 번호를 줬다. 내가 책임지고 나 말고 아무도 말 못 걸게 할 테니까 님은 좀 꺼지시라고. 원우는 그 책임감 덕분에 입학한 직후부터 네 학기 연속으로 지수랑 앉을 뻔했지만 지수가 정한이랑 영어회화 수업 같이 들어 준대서 지난 학기 수강정..
정한은 성격도 급하고 불같은 면이 있지만 지수에게는 짜증을 낸 적이 거의 없었다. 사귀기 전, 어쩌다가 팩 성질을 낸 뒤면 지수가 괜찮다고 해 줄 때까지 싹싹 빌었다. 물론 지수라고 안 괜찮다고 한 적은 없지만 정한이 그만큼 지수에게 애가 타 있었다는 소리다. 그 때는 타인에게 무심하고 무던한 지수의 성격 덕분이었지만, 정한이가 2년 넘게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지수 성격 다 버려 놓은 탓에 지수는 정한이가 제게 안 괜찮은 표정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까지 잊고 있었다. 사실 이해가 안 되고 있긴 했다. 설날에 아무 데도 안 간 지수가 한국에 집 놔두고도 안 가는 불효자식들 모아서 밥 먹고 논 게 뭐가 어떻다고? 정한이 하도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어서 평소처럼 내가 뭘 잘못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갈 수도 없..
"지수야 나 진짜 혼자 가…?" "몇 번을 물어. 얼른 가, 짐 챙겨야지." "지수야… 나 가기 싫어졌어 갑자기…." "가랄 때 가라, 나 지금 좀 짜증나려고 하니까." "우리 지수 나 가는데 하나도 안 서운해?" 어우, 진짜. 입 내민 정한의 얼굴을 밀며 지수가 눈을 흘겼다. 문지방 앞에서 현관까지 밀려난 정한이가 어린애처럼 발을 구르며 투정을 부렸다. 홍지수 너무해! 그대로 뒀다간 오피스텔 현관에 주저앉을 기세였다. 지수는 미간을 몇 번 문지르고 윤정한 목덜미를 당겨 끌어안았다. 지수가 쓰는 라벤더 향 바디워시 냄새가 정한의 체향에 섞여 은은하게 풍겼다. 솔직히 좀 짜증날 뻔했는데, 안고 있으니 웬수가 좀 애인 같아져서 아까 발 구른 것도 토끼가 스텀핑 하는 것 같고 그랬다. 금세 다정함을 회복한 지..
"윤정한 너 못 가. 가면 알아서 해." "지수야아… 설이 한국에서 얼마나 큰 명절인데 큰아들이 안 간다구 그래…." "나는 우리 집 큰아들 아닌 줄 알아?! 울 엄만 나밖에 없거든?" "지수야 진짜 나 하루만 딱 다녀오면 안 될까? 할머니만 보고 올게. 응?" "아 그래 가. 꺼져, 꺼져. 내 눈앞에서도 꺼져." "홍지수 너무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면, 민족대명절 설을 앞두고 윤씨네 맏이 정한이 본가에 가네 마네 하고 미국인 남자친구와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정한이 일방적으로 구박당하고 혼나고 있기는 하지만. 지수는 지금 입국한 지 딱 나흘째였고, 글피가 설날 당일이니 허락받기에 지금보다 나은 타이밍은 없지만 정한의 사랑스러운 남자친구는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는 ..
대관절 무슨 사연인지 지수는 정한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고야 말았다. 창문 너머 길바닥에서 쌩쌩 부는 칼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지수를 기다리는 미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기사와 멱살이라도 잡고 싸웠을 것 같은 험악한 기세로 택시 문을 쾅 닫은 지수가, 한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을 붕붕 흔들며 정한아! 하고 불렀다. 화기가 덜 가신 우렁찬 목소리에 귀를 조금 의심하면서도 정한이 지수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쳤다. 한 달 만이었다. 정한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땅을 박차고 뛰었다. "지수야!!!" "야, 넘어져! 조심해!"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바닥을 위험천만하게 달려오는 남자친구에게 양 손을 뻗으며 지수가 다그치듯이 마주 소리쳤으나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매우 밝았다. 캐리어도 내팽개치..
인천공항에 내려 캐리어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켰을 때, 지수는 경악스러울 만큼 쌓인 정한으로부터의 메시지 개수를 세며 그제야 정한에게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지낸 방학이 몇 번인데, 매번 꼬박꼬박 티켓을 보여 줬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보여 준 줄만 알고 정한이 어련히 알아서 기다리겠거니- 해 버린 거였다. 속 썩이는 남자친구 때문에 전화가 무산되어 말하지 못하고, 어리광쟁이 남자친구의 연락 집착 때문에 일부러 쿨한 척 몇 번 안읽씹을 해 버린 탓에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거였다. 내가 미쳐…. 지수는 아픈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를 겹쳐 문지르며 한 손으로 휴대폰 액정을 대강대강 내려 정한이 보낸 수백 개의 메시지를 훑었다.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정한은 비트윈에, 카톡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