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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네랑 안 놀 거야!"
기어이 승철이 울먹거리고서야 정한은 히 웃었다. 손이 빠른 지수는 벌써 승철을 붙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중이었다. 괜찮아 승철아, 이빨 다시 안 나면 내가 틀니 만들어 줄게. 정한은 속으로 그걸 위로라고 하냐, 며 여덟 살치곤 시니컬한 의견을 냈지만 보통의 여덟 살 꼬마인 승철은 코를 훌쩍이며 지수 쪽을 돌아보았다. 진짜…? 지수는 늘 그렇듯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승철의 눈가를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러엄, 당연하지. 그쯤 해서 정한도 승철을 꼭 안고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앞니 하나 없어두 승철이는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그치 지수야."
"맞아, 뭐 어때."
"그래도 너네는 이빨 다 있는데 나만 없으면…."
"괜찮아, 괜찮아. 우린 친구잖아. 그치 정한아."
"맞아, 친구잖아."
가운데에 승철을 둔 채 세 친구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눈물겨운 우정을 나눴다. …는, 이제 십오 년이 지난 감동적인 이야기.
"감동은 개뿔, 이 부부사기단 새끼들아. 이것들 내 앞니 가지고 사기 칠 때 절교를 했어야 되는데."
"앞니 다시 났으면 됐지 뭐. 우리 승철이는 이도 고르게 잘 났네~ 그치 지수야?"
"맞아 정한아. 건치미남 최승철!"
"다 꺼졌으면 좋겠다."
승철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이 담담한 말투로 그러곤 소주를 들이켰다. 연애하던 걸 들켜서 아예 정식으로 애인을 소개해 주는 자리였다. 말이 나오다 보니 승철의 옛날 이야기까지 줄줄이 해 보던 중에, 문득 어렸을 때 셋 중 처음으로 이가 빠진 승철이 정한과 지수에게 단단히 놀림당했던 이야기까지 나오고야 만 것이다. 앞니가 빠진 날 밤에 이빨요정에게 줄 오백 원을 베개 밑에 넣어놓지 않았으니 이제 새 이가 나지 않을 거라는 지수의 농담에 승철이 진지하게 놀라버린 것이 발단이 된 일이었다. 정한이 본격적으로 장난질에 눈을 뜬 것도 그 날이 기점이었다. 승철의 애인은 썩 흥미롭진 않은 표정으로 승철의 빈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엄청 어릴 때부터 친하셨나봐요."
"그렇죠, 뭐. 승철이랑 나는 유치원 같이 다녔고."
"그럼 이쪽 분은?"
"지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한이랑 같은 반이었지 아마?"
흐응. 여전히 별 흥미 없는 표정으로 그─이름은 민규라고 했다─는 승철이 퍼 주는 감자탕 그릇을 받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별달리 취한 기색이 없는 게 승철과 비슷하게 말술인 것 같았다. 사이 좋네요. 파인애플 맛 탄산음료를 홀짝이며 지수가 말했다. 그쪽도요. 민규가 어깨를 으쓱였다. 승철이 민규의 그릇에서 고기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어주며 익숙한 어투로 쟤네 안 사귄다니까, 하고 대신 대답했다.
"그건 형이 커밍아웃하기 전 얘기 아냐?"
"진짜 안 사귀어요."
"거 봐, 안 사귄다고."
"맞아. 우리 애인 사이 아니에요. …아직은."
"…뭐?!"
아직은, 을 덧붙이며 지수는 늘상 싱글벙글 웃는 낯이던 표정을 조금 진지하게 했다. 정한도 별달리 장난치는 기색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지수의 빈 잔에 탄산음료를 새로 따라 줄 뿐이어서 승철은 또 저 혼자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걸 보다못해 민규가 승철의 입 안에 깍두기를 한 개 집어넣으며 정한과 지수에게 작게 타박했다.
"2대 1로 사람 놀리지 마세요. 한 명도 아니고 둘씩이나 짝으로 놀려대니 맨날 낚이지."
"그럼 1대 1로는 해도 돼요?"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요?"
정한의 장난에 농담으로 받아치며 민규는 정한의 잔에 소주를 또 한 가득 따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정한은 그게 승철(또는 민규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 는 모종의 콩깍지인 줄만 알았다.
첫 번째 실패는 학생회관 매점에서였다. 정한은 긴 소파에 지수와 나란히 앉아 감자칩을 먹으며 애매하게 3교시까지 강의를 듣는 승철이 매점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점의 TV에 하릴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지수가 열린 문 쪽으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승철아 여기! 두리번거리던 승철이 냉큼 달려와 정한과 지수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마지막 감자칩을 승철의 입에 넣어주고 손을 털며 정한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근데 너 우리랑 놀면 애인이 싫어하는 거 아냐? 번쩍이는 감자칩 봉지를 딱지 모양으로 접으며 지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그 친구 우리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야, 민규 그렇게 이유없이 사람 싫어하고 그런 애 아니야."
"이유야 만들면 생기는 거지 별 거 있냐. 그치 지수야?"
"맞아. 어제 정한이 꽐라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던데. 호감 있으면 못 그러지. 그치 정한아."
"야아… 늬들 많이 속상했어? 너네가 계속 장난 치고 그러니까 걔도 장난치는 거지."
"나는 오늘 소중한 친구를 한 명 잃었다… 우리의 이십 년 우정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연기에 돌입하려던 정한에게 찬물을 끼얹은 건 정수리 위에 턱하니 얹혀진 편의점 봉투였다. 아 차거!! 머리꼭지에서부터 짜릿하게 타고 내리는 소름에 정한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자꾸 2대 1로 이럴래요? 어느 새 다가온 민규가 정한의 머리 위에 올라간 비닐봉투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승철에게 쥐어 주었다. 정한은 툴툴대며 까만 비닐봉투를 무릎 위로 내려 지수 몫의 아이스크림과 제 몫의 커피를 꺼냈다.
"오, 민규씨 내가 단 거 안 먹는 것도 알아요?"
"형이 그러던데요. 설탕 든 거 사오면 이쪽… 지수 맞죠? 지수 형이 다 먹는다고."
"맞아요, 홍지수 단 거 좋아하거든. 얜 그런 거 어떻게 먹나 몰라."
"난 그런 쓰고 떫은 거 먹는 니가 더 이해 안 되거든?"
지수가 투덜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었다. 옅은 색의 빵 사이에 쳐다보기만 해도 입안이 끈적거리는 것 같은 핑크색이 그득 채워진 아이스크림은 최소한 정한에게 있어서 절대 먹을 일이 없는 음식 목록에 끼어 있기에 충분했다. 정한은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삼켰다.
또 다른 실패는 승철의 과방에서였다. 광고홍보학과 정한과 실용음악학과 지수에게 체육교육학과 과방은 원래대로라면 연이 없을 공간이지만, 하도 뻔질나게 드나든 탓에 이젠 오히려 광홍 과방과 실음 과방보다도 익숙한 터였다. 왜 굳이 남의 과방에서 기다리냐는 타박도 매번 웃어넘긴 탓에 이젠 체교과 사람들도 쫓아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빈 기타 케이스를 멘 정한이 체교 과방 문을 벌컥 열었다. 이럇샤이마세! 웃기지도 않은 인사를 하며 정한이 들어서고 그 뒤로 기타 줄을 튕기며 지수가 유유히 걸어들어갔다. 오늘 서울-은 하루 종일 맑-음- 밤새 켜 뒀-던 티비 소리 드을려어-. 과제랍시고 피 터지게 연습했던 노래는 덤이었다. 안쪽 소파에 담요를 덮고 누워 있던 좀비들 중 하나가 비척비척 일어나 과방 중앙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은 정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하니혀엉…."
"순영이 오랜만이네. 어제 좀 달렸어?"
"말도 마세요. 승철 선배랑 민규랑 어제 아주 박스로 들이부을 기세여서. 아, 민규가 누구냐면요…"
"민규? 김민규?"
"네? 네. 올해 신입생인데 승철 선배가 엄청 귀여워하거든요. 하긴 둘이 좀 비슷한 타입이긴 한데."
그냥 귀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둘이 사귀어, 하고 말해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정한은 하하 웃으며 정전기로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순영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깨어나지도 못하는 좀비들이 두엇 더 남은 과방에 노래 대신 기타 소리만 느른하게 채우며 지수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그러게, 둘이는 되게 비슷하네. 정한이 무언가 말하려던 차에 과방 문이 요란하게─거의 와장창에 가까운 소리였다─ 열리며 승철이 들이닥쳤다. 실기 과제를 치르고 온 것인지 온통 땀투성이인 승철이 져지를 벗어 이마와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사물함을 열어 세면도구를 꺼냈다. 금방 올게!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승철이 사라지자 순영이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저 선배도 그렇고 민규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저렇게 쌩쌩한 거지… 그러고보니 정한이형도 술 잘 마시지 않아요? 취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잘 마신다 까지는 아니고 그냥 술자리를 즐기는 정도?"
"지수형은 하나도 못 먹고."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야. 술 먹고 풀어진 분위기를 안 좋아해서."
"형들도 진짜 대단하네 그렇게 안 맞는데 대체 어떻게 사귀어요…."
테이블 위로 올린 팔에 머리를 괴고 눈만 들어 정한과 지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순영이 중얼거렸다. 정한은 좀 어리둥절해져서 순영에게 집중해 주고 있던 시선을 들어 지수와 잠깐 눈을 마주했다. 지수도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한을 쳐다보았다. 느릿느릿 이어지던 기타 소리가 뚝 멎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지수였다.
"우리, 안 사귀는데."
"김민규가 그래? 우리 사귄다고?"
"…? 형들 민규랑 알아요?"
되려 순영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어 왔다. 아직도 좀 붓기가 남은 눈이 동그랗게 뜨인 게, 농담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한은 또 장난을 쳐볼 마음이 들었다.
"순영이가 우리 둘 중 하나를 좋아하나본데, 이런 얘기를 다 하구. 그치 지수야."
"맞아. 완전 떠 보는 거 같은 질문이나 하구. 그치 정한아."
"아니 형들 제가 그게 아니구요… 안 사귀면 정말 미안합니다…."
"아냐, 순영아. 우리 둘 중 누구인진 모르지만 죄 많은 우리가 미안해."
"맞아, 미안해. 근데 내 생각엔 아마 정한이가 더 미안해야 될 거야."
"헉. 순영이가 나를 좋아하다니 이거 부끄러운데."
"제발… 그만…"
놀림을 끊어낸 것은 수건으로 뒷머리를 벅벅 털며 들어온 승철이었다. 와 이거 제삼자 입장 되니까 엄청 재밌네. 드라마라도 보는 듯한 무신경한 말을 하며 테이블 위에 세면도구를 올려놓은 승철이 소파에 널부러진 후배들의 등짝을 한 대씩 갈기며 깨웠다. 일어나 이것들아, 늬들도 강의 들으러 가야지. 정한은 입술을 조금 뾰족하게 한 채로, 지수는 늘상 그렇듯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나란히 턱을 괸 채 그런 승철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는 승철은 매사 장난기 넘치고 어리광이 많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과방에서 선배 노릇을 하는 승철을 보는 건 정한과 지수에게 나름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술이 아직도 덜 깼는지 눈도 못 뜨고 횡설수설하는 후배의 뒷덜미를 잡아 테이블 앞에 끌어다 놓은 승철이 짙은 눈썹을 조금 까닥였다.
"뭔데, 또?"
"그으냐앙. 우리 승철이 완전 어른이네. 그치 정한아?"
"맞아 지수야. 어제는 우리한테 학교 가기 싫다구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데."
"흑흑… 불쌍한 승철이…."
"후배들의 간이나 걱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흑흑… 그치 지수야…?"
평소대로라면 둘에게 말려 그게 맞네 아니네 해명하기 바빴을 승철은 예상과 정반대로 반응했다. 또 헛소리들 하고 있지. 우는 시늉을 하던 지수의 볼을 꼬집은 것도 모자라 혀까지 쯧쯧 찼다. 꼬집힌 지수는 물론 맞은편의 정한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얘네랑 술 먹었는데 너네랑 언제 우냐.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은 둘만 있을 때나 해."
"…둘? 나랑 지수랑?"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너네 둘 중 하나랑 나지… 2대 1로 사람 몰지 말라는 게 어떻게 해야 너네 둘만 놀라는 말이 돼?"
"치킨에 맥주인가보죠. 어떻게 떨어질 생각을 못 하지."
"아 나는 쏘맥."
"치킨이면 나는 콜라…."
"형들 취향 물어본 거 아니거든요?"
퍽이나 새침하게 쏴붙인 순영의 까치집 같은 머리 위로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씌워 준 정한이 한숨을 포옥 쉬며 동그란 머리 위를 꾹꾹 눌렀다. 순영이가 나랑 지수 둘 중 누구를 좋아하길래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걸까아. 아악 형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좀 해요. 흑흑 지수야 우리 순영이가 달라졌어…
내용 없이 이어지는 장난스러운 말들 중에 정한은, 그러고 보니 또 지수와 함께였구나, 하는 생각을 그제서야 했다. 맞은편의 지수는 다만 생글생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도 장난질을 몇 번쯤 실패하고 나서야 정한은 문제를 깨달았다. 도통 지수와 떨어지는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숟가락 옆의 젓가락처럼, 베개 옆의 알람처럼 정한은 늘 지수 옆에 있었고 지수는 늘 정한의 옆에 있었다. 둘만 붙어 다니냐면 그것도 아니고, 모든 시간을 지수와 보내는 것도 아닌데 뭘 좀 하려고 보면 늘 홍지수와 함께였다. 민규가 이를 알고 한 말인지 모르고 한 말인지 정한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따져 묻기에도 수상할 만큼 둘은 늘 같이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승철을 제외한 모두의 말마따나 '사귀는 사람들처럼'.
"그치만, 워낙 어릴 때부터 친했잖아."
프라푸치노 위의 크림을 빨대로 퍼올리는 데에 집중하며 지수가 말했다. 목소리며 말투며 내용까지 무성의 삼위일체였다. 생각 좀 하면서 대답하면 안 돼? 정한은 일부러 지수의 팔꿈치를 툭 쳤다. 빨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던 휘핑크림이 다시 컵 안으로 퐁당 빠졌다. 아 씨. 크림을 떨어뜨린 지수가 성질을 내며 일그러진 크림 덩어리 위에 빨대를 푹 꽂았다.
"그럼 사실 승철이랑 사귄다고 하든가!"
"미쳤냐?! 나한테는 토끼… 아니 토끼는 좀 아니지만 아무튼 귀여운 애인이 있, 읍!!"
"이 때다 싶어 자랑하지 말고, 승철아. 누가 연애 초반 아니랄까봐 가만히를 못 있어. 그치 지수야."
"맞아 정한아. 연애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늬들이나 연애 좀 해. 허구헌 날 둘이 붙어 다니니까 사귄다는 소리나 듣지."
나중에 봐! 제 입에 철썩 달라붙어 있던 정한의 손바닥을 떼어내고선 저어기 계단 아래, 손을 흔들고 있는 민규에게로 칠렐레 팔렐레 뛰어내려가는 승철의 뒤통수를 보며 정한이 흐응, 코끝을 울렸다. 늘상 셋이 어울리다 승철이 연애를 한답시고 빠져 버리니 그런 소문─정한과 지수가 사귀고 있다는─이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최승철 웬일로 맞는 말을 다 하네. 정한이 작게 중얼거리자 지수가 되물었다. 승철이가 뭐라고 했는데?
"우리더러 연애 좀 하래. 맨날 우리끼리 붙어 다니지 말고."
"…그렇구나."
"지수 넌 인기 많지 않아? 기타도 칠 줄 알잖아."
"실음과 애들 거의 다 기타랑 피아노 칠 줄 알아서 딱히. 너야말로 인기 많잖아."
"그냥 다 친한 거지 딱히 연애 상대로 인기 많은 건 아닐 걸. 너도 알잖아, 나 막상 고백받은 적은 거의 없는 거."
"눈치 좀 봐 가면서 살어. 누가 보면 너 아쿠아리움 스케일로 어장 치는 줄 알겠다."
가자. 계단에 쭈그려앉아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난 지수가 정한에게 손을 뻗었다. 어장이라니, 도대체 누가 그래? 같은 질문은 타이밍에 밀려 어정쩡하게 입 속으로 다시 삼킨 채로 정한은 지수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고 몇 모금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며 정한은 아쿠아리움, 이라는 단어를 되새겼다. 그냥 사람이 좋을 뿐인데 그 정도로 보이나. 역시 너무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건 별로겠지….
좀 떨어져 다니며 연애나 하라는 승철의 충고는 이미 저 멀리 어딘가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해서 승철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승철의 여가시간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친구를 위해 할애하는 비율이 늘어났다. 정한은 어장이라는 평가가 꽤 충격적이었는지 활발하던 외부 활동을 조금 줄였다. 지수는 늘 그렇듯이 모두와 친한 동시에 누구와도 친하지 않은 소위 '인기 많은 아싸' 생활을 유지 중이다.
인기 많은 아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주 밥 같이 먹고 커피 같이 마시고 도서관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곤 승철과 정한 둘뿐이었는데, 승철이 연애에 정신이 팔린 지금 지수의 곁에 남은 거라곤 철벽남이 되어보기로 결심한 정한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하필이면 승철이 연애를 시작한 참에, 하필이면 이 시점에 철벽을 결심한 정한만이.
"이제 슬슬 인정할 때 안 됐어?"
"응? 뭐를?"
"친구에서 애인도 뭐, 나쁘진 않지. 사람이 꼭 사귈 생각으로 만나야만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나."
"얘가 말 놓으랬더니 정신을 놨나… 이제 아니라고 말하기도 지친다."
따지면 승철이랑 나랑이 제일 오래 됐다니까? 정한의 농담에 민규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와 정한아 민규 표정 좀 봐! 백 리 밖에서 봐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지수가 짐짓 무서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아닌게아니라 가뜩이나 이목구비가 진한 얼굴에 눈을 치켜뜬 탓에 분위기가 살벌하기는 했다. 홍지수고 윤정한이고 그런 거에 겁먹을 인물은 아니지만, 대담한 친구들 덕에 특별히 간담 키울 일이 없던 승철만은 찔끔한 얼굴을 했다. 방바닥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슬금슬금 민규 가까이로 붙이며 승철이 슬쩍 민규의 눈치를 보았다.
분풀이라도 하듯이 술잔 가득 찰랑거리던 소주를 꺾지도 않고 한 모금만에 넘겨버린 민규의 잔을 다시 채워주며 승철이 민규를 살살 달래는 동안 정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한이 아는 승철은 눈치가 없으면 없었지, 남 눈치 보는 인물이 아니었던 탓이다.
"아, 최승철 변했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치 지수야."
"어떻게 키웠는지 안 봐도 DVD네. 적당히 좀 하지?"
"…장난 안 칠 테니까 정직하게 말해 봐, 민규야. 너 우리 잡아먹으러 나왔지."
눈썹을 조금 늘어뜨린 지수가 묻자 민규는 ─정한을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이렇게 안 하면 또 시동 걸릴 거 같아서. 이번엔 정한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양심도 없이 제가 뭘 했길래 경계하냐며 툴툴대는 것을 입에 치킨 조각을 쳐넣어 막은 지수가 생글생글 웃었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협박은 덤이었다. 대놓고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던 민규가 종이컵에 소주를 반 정도 따라 밥상 중앙에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금칙어 정하자.
"갑자기 웬 금칙어?"
"정한이 형은 그치 지수야, 한 번 할 때마다 이거 원샷하기."
"아 그러셔… 승철이는 민규한테 뭐 먹여줄 때마다 원샷하기."
"지수 형도 그치 정한아, 한 번 할 때마다 마셔. 형도 예외 없다 이번에는."
"그럼 민규는 틱틱거릴 때마다 원샷. 이거 52분부터 시작한다? 다들 이의 없지?"
8시 51분이 띄워진 휴대폰 화면을 흔들어 보이며 정한이 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날 네 명은 모두 술 마시던 상태 그대로 민규의 자취방에서 떡이 되어 잠들었다. 기실 그 날의 금칙어 게임에서 지수는 가만히 앉아서 승철과 정한과 민규가 서로 트집을 잡으며 주거니받거니 취해가는 동안 옆에 앉아서 흰올빼미마냥 눈을 동그랗게 휘어 웃은 죄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괘씸죄였다. 막판에 지수는 종교적 이유까지 들이밀었지만 반쯤 이성을 잃은 건장한 남자 세 명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말실수 한 번 안 하고 술을 얻어마신 게 그리도 억울한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지수는 삼 일째 정한의 연락을 모조리 씹는 중이었다. 승철에게 물어봐도 글쎄, 뿐이었고 민규는 저 그 형 번호도 몰라요- 하고 땡이었다. 사랑에 미친 불나방놈들이야 그렇다쳐도 정한은 졸지에 외로운 도토리가 되었다. 가을이 일찍 찾아온 캠퍼스는 하늘이 높고 바람은 차고 물들어가는 낙엽이 한 잎 두 잎 굴러떨어지는데, 일전에 승철과 지수와 나란히 앉아 커피 한 잔씩 쪼로록 마시던 중앙도서관 앞 계단에 오늘은 정한 혼자였다. 사랑에 미친 승철이 3학년이나 된 주제에 신입생처럼 간 크게 자휴를 선언한 터라 체교 과방에 죽치고 있기도 머쓱했다. 자기네 과방에 가자니 '바쁘다'거나 '선약이 있다'며 거절해버린 연락들이 줄줄이 떠올라 면구스러운 탓에, 비어버린 공강 두 시간 동안 갈 곳이 없어서 앉은 게 겨우 중도 앞 계단이었다.
"형! 안녕하세요!"
"아뇨, 저 책 빌린 거 있어서 반납하러 왔어요. 형은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지수 형은 어쩌고?"
"지수가 전화를 안 받아…."
"…아, 네에…."
"진짜 안 사귄다니까."
"누가 뭐래요?"
키득대며 순영은 시무룩한 얼굴의 정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아까 호수 둔치에서 지수 형 봤는데요. 약올리듯이 던졌지만 정한은 무념무상, 손에 든 아메리카노가 소주라도 되는 것처럼 씁쓸하게 마실 뿐이었다. 누구랑 있었게요. 그 말엔 대답으로 순영의 말랑말랑한 볼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쓸데없이 떠보지 말고 다이렉트로 던지라는 거였다. 빨갛고 작은 손가락 자국 두 개가 남은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순영이 툴툴거렸다. 질투하는 척도 안 해요? 그제서야 정한은 순영 쪽으로 몸을 틀었다.
4학년이 되면 이런 짓도 못할 거라며 탈색을 세 번이나 한 밝은 금발머리가 가을 바람에 날려 정한의 희고 둥근 이마가 드러났다. 머리색에 맞춰 가볍게 탈색한 눈썹 아래 쌍꺼풀 짙은 눈은 나른한 빛을 띄고 있었다. 가을 오후의 황금빛 햇살 아래, 고풍스럽게 건축된 도서관 건물을 배경으로 두고 정한은 신인지 인간인지 모를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얼굴로 순영에게 말했다.
"죽고 싶니?"
"죄송합니다……."
정한의 얼굴에 약 3초간 홀려 있던 순영이 엄한 가방끈만 움켜쥐며 시선을 피했다. 정한은 제 얼굴의 파급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영을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순영은 술술 불었다. 이석민(은 지수의 실음과 후배로, 정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과 함께 있었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가 매우 낮았으며, 순영이 인사를 하자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당황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별 얘기 하지 않았다며 미리 정색하더라는 것까지. 다 듣고도 정한은 별달리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심드렁한 얼굴로 그러냐, 한 마디 할 뿐이었다. 되려 순영이 더 파닥거렸다. 전화 안 받았다면서요! 피식 웃으며 정한은 순영의 까만 머리카락을 토닥이듯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도 지금 너랑 있는데 뭐 어때. 별 얘기 안 했나보다 하는 거지."
"전 그냥 지나가다 만난 거잖아요."
"석민이도 지나가다 마주친 걸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화를 내."
"…전화 안 받은 지는 며칠 됐어요? 형 혼밥도 싫어하잖아요."
정한은 말없이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손가락을 세 개 펴보였다. 히익. 순영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등 뒤에서 누군지 모를 학생들이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소음을 배경으로 정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짜증보다는 걱정이 가득한 게 조금만 더 찔러보면 다 털어놓을 것 같아서 순영은 몰래 눈을 빛냈다. 형 그러지 말고 저한테 한 번 얘기라도 해 봐요. 원래 기쁜 일은 나누면 두 배고 힘든 일은 나누면 절반이라잖아요. 지수 형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요? 정한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며칠 전에 억지로 술 먹인 거 때문에 삐진 거겠지."
"와 술 싫다는 사람한테… 형 진짜 양심 없, 아 실수! 실수! 죄송합니다!"
가차없이 순영의 귀를 쭈욱 잡아당기던 손을 놓은 정한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잘못한 거 나도 아니까 가만히 좀 있어. 벌개진 귀를 움켜쥐고 끙끙대던 순영이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랬는데요…. 승철이랑 민규랑 넷이 술 먹다가 나머지 셋이 취해서 억지로 먹였노라고 순순히 불기에는 순영의 선후배 두 명의 체면 이전에 본인의 염치없음이 너무 부끄러워서 정한은 무릎을 모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건방지게 정한의 등을 토닥이며 순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수 형 없이 형만 있으니까 허전하네요.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정한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너 그게 무슨 뜻이야? 괜히 제 발 저린 순영이 미리 양 손바닥으로 귀와 뺨을 감쌌다. 하지만 정한은 정말 몰라서 묻는 사람처럼 궁금한 얼굴을 하고 대답을 재촉할 뿐이었다. 무슨 소리냐니까? 순영아. 뭔 말이냐고.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래. 순영아. 왜 그런 말을 했는데?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잘난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미인 앞에 장사 없다고 순영은 결국 줄줄이 털어놓고 말았다.
"두, 둘이 맨날 붙어 다녔잖아요…. 같이 사는 것도 아니면서 학교도 같이 오고, 집에도 같이 가고, 밥도 같이 먹고! 실음과 신환회 가는 광홍 선배랑 광홍 개총 때 뻔뻔하게 투표권까지 행사했다던 것도 다 선배들 얘기죠!! 무슨 원플러스원도 아니고 한 명 부르면 두 명이 온다고 온 학교에 소문이 자자한데 나, 나한테만 뭐라그러구… 허엉… 나는 진짜 사귀는 줄 알았을 뿐인데에…."
끝내 울먹이기까지 하던 순영이 만화 속 등장인물처럼 책을 껴안고 형 미워요! 만을 남긴 채 도서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좋아하네 어쩌네 놀림당한 게 어지간히나 억울했던 모양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도 달리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정한의 다리께에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왜 귀여운 후배를 울리고 그래. 지수가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즐겨 입는 청바지에 헐렁한 스웨트셔츠를 입고 아마 오늘은 진짜 기타가 들어있을 케이스를 등에 멘 지수가 늘 그랬듯이 정한의 옆에 앉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옆자리.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깝지만, 그건 손을 뻗지 않는 이상은 닿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익숙한 거리에 자리잡고 앉아 지수는 헐거워진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선선하고 건조한 가을바람 때문에 정한은 코가 좀 매워졌다. 꼼꼼한 손끝으로 예쁘게 신발끈을 매듭지은 지수가 무의식중에 정한 쪽을 쳐다보다 흠칫 놀랐다. 너 울어?! 정한은 그제서야 코끝을 맵게 한 주범이 쌀쌀한 가을 바람이 아니라 지수라는 걸 깨달았다.
얼핏 상냥하지만 가까운 자리는 내주지 않는 냉정한 지수. 달짝지근한 설탕 맛을 좋아하는 지수. 그런데도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정한의 옆에 늘 있어주던 지수.
정한은 코를 가볍게 훌쩍이고 엉덩이를 지수 쪽으로 옮겨 붙였다. 지수는 고쳐 묶을 것도 없이 예쁘게 묶인 신발끈 매듭만 노려보았지만 정한을 피해 물러나지는 않았다. 콧등이 싸하고 목 뒤쪽이 무거웠지만 더 이상 눈물은 고이지 않았다. 정한도 지수도 승철과는 거리 없이 꼭 붙어 앉고 손을 뻗어 끌어안았는데, 어째서 정한과 지수 사이에서만은 그게 잘 안 됐는지 정한은 이제서야 좀 알 것 같았다. 지수가 왜 그렇게 술 마시는 걸 거부했는지도.
소주 두 잔 분량의 술에 몇 병씩 마신 친구들과 비슷하게 취해 버린 지수는 답잖게 애교가 늘어서 정한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다 마침내 정한의 어깨에 조그만 머리를 폭 기대고 꼬박꼬박 졸았다. 술김에 정한은 킥킥 웃으며 지수의 머리를 제 허벅다리 위로 올렸다. 술기운에 풀어진 분위기가 싫다던 지수는 일단 취하고 나니 밑도 끝도 없이 귀여운 짓만 해댔다. 허벅지에 머리를 부비고 헤실헤실 웃으며 정한의 빈 왼손을 만지작거리고 깍지를 꼈다. 애교 많은 고양이 같은 지수의 뺨을 쓸고 턱 근처를 간지럽히며 계속 떠들려니, 고장난 기계처럼 무슨 말에도 뒤에 그치 지수야, 가 들러붙었고 그러다 보니 밑 빠진 독마냥 술이 들어가고…
쌀쌀한지 지수가 무릎을 조금 움츠렸다. 정한은 말없이 지수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남들에겐 멀어도 정한에게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어 주던 지수가 손을 올려 정한의 옆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지수야."
"응."
"화 많이 났어?"
"됐어. 넌 기억도 안 난다며."
잊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정한은 그 날의 지수만은 숨소리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케이크 사 줄까?"
"어디서?"
"너 먹고싶은 데서."
"…밀크티도."
무릎 위에 일없이 얹혀진 지수의 손 위로 정한이 손바닥을 얹었다. 놀란 아이처럼 지수가 손을 움츠렸다. 동그랗게 주먹을 쥔 지수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정한은 일부러 지수의 어깨 위로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찬바람에 조금 식은 지수에게서는 흔한 섬유유연제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다. 또 뭐 먹고 싶어. 정한이 묻자 지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스테이크…. 정한은 피식 웃었다.
술을 더 가지러 간다던 승철이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잠든 것을 겨우 끌어내 부엌 바닥에 대충이라도 눕혀 두고 정한이 조그만 미닫이문을 넘어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 민규 옆에 가지런히 뉘어 놓았던 지수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지수는 술만 들어가면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곤 했기 때문에 정한은 남은 체력으로 지수를 달래 재우는 것과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중 뭐가 효율적일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지수는 까맣게 어둠이 물든 방 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정한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졸린 눈도 아니고 하품 한 번 하지 않는 게, 잠깐 졸았다고 술이 홀랑 깨 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정한이 조용히 옆에 앉는 동안 지수는 시선만 조금씩 움직였다. 팔을 어깨 뒤로 해 반쯤 끌어안은 채로 다시 눕히자 고분고분 누웠다. 재워 주기까지는 포기하고 정한은 그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술에 취한 상태로 아예 떡 된 놈들 셋을 수습하는 건 아무리 정한이라도 피곤한 일이었다. 정한아 자? 지수의 목소리가 나즈막했다. 하지만 정한에겐 목을 울려 작게나마 대답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었다. 지수는 정한이 아예 잠들었다고 생각한 듯 술기운에 훨씬 더 나른해진 목소리로 한참이나 속살거렸다. 아마 정한이 제 속삭임을 귀기울여 듣느라 잠을 다 깨버렸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수야."
"응?"
"오늘 저녁에 바빠?"
사흘 내내 정한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수는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연락을 받지 않는 지수는 화난 걸까 아니면 부끄러운 걸까. 에라 모르겠다 싶어 던진 '기억 안 난다'는 말에 그제서야 돌아온 '나쁜 새끼' 네 글자는 술에 취하게 해서일까, 못 들었다는 거짓말 때문일까. 혼자서는 결코 답을 알 수 없는 고민만 사흘 내리 하고 드디어 지수를 봤을 때, 답을 얻지 못한 정한은 스스로에 대한 결론만을 내렸다. 윤정한도 홍지수를 좋아한다고. 그 동안 수없이 부정해 왔던 질문들에 드디어 긍정의 답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안 바빠."
"저녁때 둘이 스테이크 먹을까?"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건 없는데…."
"주말엔 놀러 가자. 낙엽 져서 길도 예쁘겠다."
정한의 손바닥 아래에서 지수의 손이 꼬물거렸다. 데이트 신청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는 것 같아 정한은 지수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넣어 얽으며 쐐기를 박았다.
"너는 어떻게 딱 지금 그렇게 로맨틱한 걸 먹구 싶어해. 내가 무슨 말 할지 아는 사람처럼."
"술 마셔서 기억 안 난다고 한 거 역시 거짓말이지, 이 사기꾼아."
"나만 사기꾼이야? 우리 묶어서 부부사기단 한 세트잖아. 그치 지수야."
"맞아 정한아. 근데 한 번만 더 술 먹이면 너 진짜 죽어."
"…7교시 꼭 들어야 돼? 우리 케이크 먹으러 갈까?"
"대답 똑바로 안 해?"
지수가 정한의 발등을 꾹 밟았다. 아파 지수야아, 정한이 엄살을 부리며 지수를 끌어안았다. 지수는 입을 삐죽였지만 정한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깍지껴 잡은 손은 여전히 꼭 쥔 채였다.
윤정한은 단 맛이라면 질색을 하고, 향수는커녕 섬유유연제 냄새조차 견딜 수 없어하고, 느릿느릿 걷는 것을 좋아한다. 홍지수는 자전거 라이딩을 좋아하지만 아마 주말에 지수는 캔버스 슬립온을 신고 정한과 천천히 걷게 될 것이다. 대신 정한은 보기만 해도 달콤한 케이크를 앞에 두고 지수와 함께 차를 마셔주겠지. 그동안 정한과 지수가 수없이 해왔던 많은 것들이 '데이트'라는 이름을 갖게 될 역사적인 첫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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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날 케이크도 마다하고 정한의 손을 잡은 채 체교과 과방으로 향한 지수가 승철과 민규를 과방 테이블에 앉혀 놓고 '다시는 홍지수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지 않겠습니다'를 골자로 한 각서를 받아냈다든지, 어차피 사귈 거면서어- 하고 순영이 억울하게 책상을 탕탕 쳤다든지, 사실 석민이 지수에게 물어본 것은 체교과 권순영이랑 친한지였다든지…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사족 같아 모조리 썰어낸 9월입니다. (정한이가 실은 광고홍보가 아니라 광고제작과라는 사실은 저만 알고 싶습니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썸 타는 윤홍을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은데 실제 윤홍이 그러고 있기 때문이고 저는 죄가 없습니다 흑흑 윤홍 빨리 결혼해 LA가서 혼인신고 하고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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