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외

[순겸] 검고 푸른 날들

배제 2018. 2. 4. 21:49



0.

 이석민. 예전엔 도겸이라고도 불렸던 것 같다.

직업은 보스의 애인. 그 전 직업은 잘 나가는 선수집 호스트.







1.

 처음 본 날까지 기억하지는 않는다. 마주칠 일이 꽤 많았고, 보스가 시키는 만큼만은 곁을 지켜야 했다. 

큰 싸움이 될 것 같은 날이면 보스는 가장 번화한 시내의 큰 호텔 중 가장 화려한 방에 그를 가두고 내가 그 침대 곁을 지키게 했다. 그런 날마다 이석민은 조금 훌쩍거리다가, 여러 번 한숨을 쉬고 얕게 잠들었다. 내가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편으로 바꿀 때 가죽 소파와 옷자락이 마찰되는 소리만으로도 파드득 일어날 만큼 가벼운 잠이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푹신한 카펫 위에 그냥 주저앉은 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잠든 이석민의 얼굴을 지켜보고는 했다. 그렇게 예민한 잠 속에서도 이석민은 종종 악몽을 꾸는지 헛소리를 하고 비명을 질렀다. 굳이 깨워 주지는 않았다.







2.

"나 온더락 한 잔만 주세요."

"형님께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 잔쯤은 티 안 나요. 딱 한 모금만이라도. 네?"

"안 됩니다."

"지금 승철씨 없잖아. 와도 절대 안 들켜요."

"안 된다면 안 됩니다."

"…짜증나. 누가 최승철 오른팔 아니랄까봐. 진짜 싫어."



이석민은 새하얗고 푹신한 이불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썼다. 울음이 덜 가신 등이 구름 같은 이불 속에서 작게 들썩거렸다. 달래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석민은 곧 잠들었다.







3.

 제일 가까이에서 이석민의 수발을 드는 사람은 우리 중 드물게 대학까지 나온 김민규였다. 보스의 저택에는 원래 입주 가정부가 있었지만, 이석민이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벌어졌던 습격 사건 때 현관문 옆 방을 쓰고 있던 그녀는 제일 먼저 살해당했다. 가장 깊은 방, 옷장 속 옷들 사이에 가려진 비밀 문 뒤에 겨우 숨은 이석민은 황급히 돌아온 보스가 미친 사람처럼 제 이름을 외치는 것을 듣고도 나오지 못했고 걸려 있던 코트 몇 벌이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듯 구겨진 걸 알아차린 내가 두껍지도 않은 문을 발로 차 부쉈을 때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이석민을 업고 보스를 불렀던 그 날부터 보스는 따로 저택에 일하는 사람을 들이지 않았고, 대신 현관문 밖으로 보란 듯이 똘마니들을 새까맣게 깔았다. 이석민은 청소도 요리도 더럽게 못 했지만 설거지만은 기가 막히게 잘 했다. 혹시 어디의 쉐프 밑에서 주방보조로 설거지만 배우다 나왔냐고 농담을 했더니 쓰게 웃으며 아니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날마다 술 마시고 두들겨패는 집구석에서 뛰쳐나와 밑바닥 삐끼부터 시작해 잘 나가는 선수까지 된 거라는 말은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민규 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호스트를 첩으로 들인 건 보스가 아니라 보스의 죽은 형이 먼저였다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나중에, 아주 우연찮은 계기로 얻어듣게 되었지만.



─제발요, 그만, 아, 아악, 제발!

─왜.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니에요. 안, 아윽, 아니, 아…, 싫, 으흑,

─형이 해줄 땐 좋다고 질질 싸더니. 아직도 그 새끼 생각해?

─흐으, 싫어어, 앗, 승철, 승철씨이…!!



흐느낌 섞인 신음소리 사이엔 중간중간 형, 이라거나 예전, 혹은 빚, 같은, 과거사와 잘 어울리는 구질구질한 단어들이 엉켜들어갔다. 나는 애초에 보스를 찾으러 왔던 목적을 잊고 노크하려던 손을 든 채 한참이나 굳어 그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덜 닫힌 문을 소리없이 닫으려 손잡이 쪽으로 시선을 내렸을 때, 시야에 잡힌 내 바지 앞섶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여자를 만나야겠다고.








4.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알려진 보스는 유일하게 이석민만은 아끼는 티를 냈다. 꽤 큰 조직 보스의 유일한 애인인 것치고 이석민은 욕심이 없었지만 가끔 그가 아주 사소한 일, 예를 들면 민들레 홀씨를 불고 싶어한다거나 하면 보스는 그 날 중으로 이석민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 놈의 민들레 이야기를 한 날은 조무래기들을 시켜 온 동네를 돌며 하얗게 부푼 민들레를 잔뜩 캐서 화분에 곱게 담아오게 했었다. 보스가 들어주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거였다.



"저도 가면 안 돼요? 사무실만 들렀다 바로 온다면서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 있어."

"같이,"

"민규야, 모셔라."



이석민은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순순히 김민규를 따라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텅 소리를 내며 무거운 방탄 철문이 굳게 닫혔다.


보스가 탄 차는 내가 혼자 운전했다. 뒷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보스가 아마 이석민이 매어 주었을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철이 없는 건지 둘 다인지. 나직한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넘길지 지나가듯이라도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 나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가끔은 데리고 나와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님.



"넌 또 왜 갑자기 이석민 편이야."

"그게,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저러는 것 같아서, 차라리 형님이 데리고 나오시는 편이."

"권순영."

"예."

"너야말로 정신이 있어 없어? 요새 백룡파가 잠잠하니까 한가한 것 같냐? 그 새끼들이 꿍꿍이 없이 닥치는 거 봤어?"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못 해주는 것도 없는데 뭘 나오고 싶어서 애를 태워. 옷장에서도 못 나온 주제에."



보스의 말투는 미묘하게 불평 같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








5.

 이석민은 속없는 놈처럼 헤실헤실 웃는 것과 설거지 말곤 잘 하는 게 별로 없었다. 청소나 요리는 민규가 아예 다 한다고 했었다. 집안일만 못 하는 게 아니라 어긋난 벽시계의 시간을 맞추는 것부터 휴대폰의 사진첩을 정리하는 것까지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이석민이 운전면허가, 그것도 1종 수동 면허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의도치 않게 놀란 티를 내고 말았다.



"걔도 나름 넘버원이랍시고 외제차 끌던 놈인데 면허쯤은 있지."

"그래도 운전 안 한 지 몇 년 된 것 아닙니까?"

"한 이삼 년 됐나. 미원에서 데려올 때 차 팔았거든."



미원의 여름 별장은 원래 보스의 죽은 친형 것이었다.



"못 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길래 기절할 때까지 그 차에 가둬 놨더니 오자마자 팔더군."



이석민은 덥고 뜨거운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아무튼 이제 장롱면허지."

"그렇습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보스는 그저 싱글싱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6.

 조직이 뒤를 봐주는 실장이 여자를 하나 보내주었다. 실장이 관리하는 애들 중에 제일 몸값 비싼 년이라고, 그런 호칭으로 불린 여자는 얼굴에 앳된 티가 역력했다. 기계적으로 웃어 보이는 여자를 데리고 그저 그런 호텔에서 대충 섹스를 했다. 건성으로 뒤처리를 끝낸 뒤 내가 먼저 돌아눕자 그제서야 그녀는 나를 등지고 옆으로 웅크려 누웠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뒤척이다 밤이 깊어 동이 틀 즈음에야 그녀가 먼저 잠들었다. 나는… 나는 이석민 생각을 했다. 내 책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 진짜 이석민 생각. 


달동네를 뛰쳐나와 나이트 삐끼가 되었다가 하룻밤에 몇백 몇천만원을 버는 호스트가 됐다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전 보스의 맏아들과 조용히 숨어 살다가, 이제는 그 동생의 애첩이 되어 넓은 저택에 갇혀 있는 이석민. 여름 별장의 숨막히는 녹음 속에 파묻힌 채 점점 뜨거워지는 차 안에서 울며 죽은 연인을 찾다 열사병으로 기절한, 이석민. 과거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게 순진한 표정을 하고 환하게 웃는 얼굴.


나는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조금 웅크렸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면 보스는 조용히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이석민의 옛 연인처럼 사지가 토막나 어딘가에 가라앉거나 파묻히거나 불타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석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7.

"부르셨습니까."

"순영아."

"예, 형님."

"이석민 요즘도 나가고 싶어하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와는 대화를 잘 안 해서."

"그래? 당분간 강릉 가 있을 예정이라 데려갈까 했더니."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님 말고지 뭐. 못 갈 수도 있는데 괜히 기대시키기 싫다."

"강릉에 애들 몇 명 미리 보내놓을까요?"

"됐어. 나가 봐."







8.

 보스는 강릉에 이석민을 동행했다. 얼굴을 꽁꽁 싸맨 채 내내 차에 있거나 호텔에 머무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고는 해도 나름 바깥 공기를 쐬어서인지 돌아온 이석민은 한층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보스도 드물게 웃는 낯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일이 잘 된 것인가 했지만 책상의 서류가 늘지도 줄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딱히 진척은 없었던 것 같고, 그 날 밤은 저택에서 모든 사람을 물렸다. 경호원으로 들어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김민규는 물론 나마저도.







9.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스의 명령에 들뜸 이외의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

난 네가 누군지 몰랐어

너는 햇살이었고, 바람이었고, 즐거운 충동이었지

너는 가루같은 물방울이었고, 춤이었고, 

맑고 높은 웃음소리

항상 내게 최초의 아침이었어


-황강록, <검고 푸른 날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